제 2절 일제강점기 태인 지역의 독립투쟁
1. 일제강점기의 무단정치
일제강점기의 35년은 한국 민족의 장구한 역사상 단 한번 있었던 민족의 정통성(正統性)과 역사의 단절의 시기였다는 점에 치욕적인 특성이 있다.
일본은 1860년대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전후하여 급격히 근대화의 길을 걸으면서, 종래 조선 정부의 대일외교정책에 순응하여 수동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던 대(對)조선의 외교방향을 능동화하여,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국권피탈(國權被奪)에 이르기까지 긴 침략의 장정(長征)에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일본은 대원군의 하야로 개국으로 급전(急轉)한 조선 정계의 기류를 타고, 조선의 문호 개방에 첫 수호국(修好國)으로서 한반도에 상륙한 이래, 개화파(開化派)와 수구파(守舊派)의 쟁패(爭覇), 임오군란·갑신정변 등 격변 속의 조선정계에 교묘히 대처·편승하면서 꾸준히 세력을 부식하여 나갔다.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종래 조선의 종주국이었던 청국과 일전을 겨루어 청국세력을 한반도에서 밀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부터는 갑오개혁으로 조선의 개국 이래의 정치제도를 개혁하는 데 깊이 관여하게 되었고, 명성황후 시해(弑害)를 주도한 이후에는 한때 러시아 세력에 밀려나기도 하였으나, 러·일전쟁에 승리하여 한반도에서의 정치·군사·경제상의 우위(優位)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1904년 2월 러시아와 전쟁 중이던 일본은 한국 정부를 강압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성립시켜 내정간섭의 발판을 만들고, 같은 해 8월에는 제1차 한일협약인 ‘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韓日外國人顧問傭聘)’을 체결하게 하여 고문정치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식민지화 공작에 들어갔다. 1905년 제 2차 한일협약인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이에 따라 1906년 2월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른바 보호정치를 펴 외교권을 대행하는 등 실질적인 지배에 들어갔다.
이어 1907년 7월에는 헤이그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退位)시키고, 정미 7조약(丁未七條約)을 강제하여 통감이 입법·사법·행정 전반에 걸친 통치권을 전단(專斷)하도록 하였으며, 한국인 대신(大臣) 밑에 실권을 장악하게 하는 일본인 차관을 두는 차관정치를 실현하였다. 또한 ‘한국 사법 및 감옥 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를 통해 한국의 사법권을 탈취하였으며, 이어 한국군대를 해산하였고 한일경찰관을 통합하여 한국 경찰관을 일본 관헌의 지휘 감독아래에 두었다.
마지막 단계로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韓日合倂條約)의 체결을 강행함으로써 일본의 한국식민화 침략은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한국위정자들의 무능과 이완용(李完用)을 필두로 한 친일내각, 이용구(李容九)·송병준(宋秉畯) 등으로 대표되는 일진회(一進會) 등 매국노들의 반역행위도 큰 몫을 하였고, 미국·영국 등 열강국들의 묵인도 일본에게 도움을 주었다. 일본은 한국병합을 달성한 뒤 종래의 통감부를 폐지하고 보다 강력한 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를 설치하여 같은 해 10월 1일부터 구체적인 한반도의 경영에 들어갔다.
한국을 병합한 직후부터 1919년 3.1운동까지의 이 시기는 식민지 지배체제를 굳히기 위하여 기초 작업을 한 시기로서, 행정·군사·입법·사법 등 모든 정무에 독재권을 가지고 있던 조선총독이 강력한 헌병·경찰력을 배경으로 폭력적인 군사 통치를 자행한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조선총독부의 출범 당시 한국에는 일본의 2개 보병사단과 약 4만의 헌병 및 경찰, 2만여 명의 헌병보조원이 전국 요소에 배치되어 있어 이를 발판으로 한국인의 항거를 억누르면서 효과적인 헌병경찰정치를 펴나갔다.
병합 이전의 통감부시대부터 경찰업무에 관여하여 온 일본군대는 총독부 직제에서도 주한일본헌병대사령관이 총독부 경무총장을 겸하고 전국 각 도의 헌병대장이 해당 도의 경무부장을 겸하여, 이들은 한국인의 정치적 결사 및 독립운동을 적발, 처단하고 애국지사들을 예비 검거하여 고문을 가하는 등 민족부흥운동에 1차적으로 탄압을 집중하였다.
일본은 또한 모든 집회를 금지하고 한글로 된 신문도 폐간하였으며, 관리는 물론 교원에게도 제복을 입고 칼을 차게 하여 위압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일본은 이와 같은 헌병경찰체제(憲兵警察體制)를 배경으로 한국 산업 경제를 그들에게 예속화하기 위한 기반조성을 병행하여 회사령을 실시해서 민족자본의 성장을 억제하고, 광산물 산지와 어장을 약탈하는 한편 무역을 통한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였으며, 교통·운수·철도·도로·항만·통신·금융·재정 ·화폐 등 모든 부문을 식민지적 예속체제로 개편함으로써 정치·군사에 이어 경제적 지배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일본은 특히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에 역점을 두어 1910∼1918년 2,456만 원을 투자해서 전국적으로 실시, 신고절차가 복잡하거나 기타의 사유로 신고기간 내에 신고하지 못한 경우, 사유(私有)와 점유의 한계가 불명확한 경우, 또는 일본관헌의 위압 등으로 많은 한국농민의 점유 토지와 소유권이 박탈되었다. 또한 동리와 종가(宗家)의 공유지, 구 조선정부의 공전(公田)·역토(驛土)·둔토(屯土) 등 전국토지의 약 40%를 약탈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은 결국 일본의 막대한 토지약탈과 한국인의 토지소유의 영세화를 촉진하였다. 이 약탈한 토지는 그들의 국책대행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東拓)에 넘겨져 일본인 지주의 한국진출을 적극 도와 대규모 한국인 소작농을 상대로 한 일본지주의 농장이 개설되었다.
일본은 또한 한국산 쌀을 싸게 사들여 본국으로 수출하는 반면 한국인에게는 싸게 수입한 만주속(滿洲粟)1)으로써 식량부족을 보충하게 하였다. 1919년 당시 쌀 총생산량 1,270만 3,000섬 중 대일 수출량은 22%인 280만 섬에 이르렀고 한국인의 1년간 1인당 쌀 소비량은 0.68섬으로 저하한 데 반해 일본인의 경우는 1.14섬에 이르러 한국인보다 약 2배의 쌀 소비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의 일본 측 기록에도 한국 농민의 50%는 춘궁기(春窮期: 3∼5월)에 초근목피로써 연명을 한다 하였는데, 농토를 빼앗기고 굶주린 한국인은 유민(流民)이 되어 간도, 연해주(沿海州) 등지로 떠났다.
데라우치와 제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 의해 통치된 1910년대의 가장 큰 정치적 사건으로는 민족지도자의 집결체이던 신민회를 말살하려고 조작하였던 105인 사건이 있다. 1911년 안명근(安明根)의 데라우치 암살기도 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조작한 이 사건으로 유동렬(柳東悅)·양기탁(梁起鐸) 등 105인의 지도자가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다. 한국의 민중은 이와 같은 탄압에 3.1운동이라는 거족적 웅변으로써 죽은 민족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2. 일제강점기 지방 행정 조직의 개편과 태인
1910년 이전의 지방의 행정구역은 13도(道), 317군(郡) 4,322면(面)이었는데, 1910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지방관제(朝鮮總督府地方官制)를 공포(公布)하여 종래의 도 관찰사(道 觀察使)를 도장관(道長官)으로 개칭(改稱)하고 지방의 부(府), 군(郡), 면(面)을 두었으며 또 10월 1일에는 총독부령(總督府令)으로 면(面)에 관한 규정(規定)을 실시하여 종래의 면(面), 사(社), 방(坊), 부(部)등 여러 명칭의 행정구역(行政區域)을 면(面)으로 통일했다.
1914년 4월 1일에 부(府)․군(郡) 폐합(廢合)으로 전라북도(全羅北道)는 폐군(廢郡)이 14개 군(個郡), 신설(新設)이 1개 군(個郡)으로 1부(府) 14군(郡)이 되었으며 정읍군(井邑郡)은 종래의 태인군(泰仁郡) 18개 면(面), 고부군(古阜郡) 15개 면(面), 정읍군(井邑郡) 8개 면(面)을 병합(倂合)하여 정읍군(井邑郡)으로 신설되었고 행정구역은 19개 면, 이때 정읍군(井邑郡) 정읍면(井邑面)이 신설되었다. <표 7-6>
<표 7-6> 태인군(泰仁郡)의 행정구역2) 군내면 (郡內面) 인곡면 (仁谷面) 흥천면 (興天面) 남촌이변면 (南村二邊面) 서촌면 (西村面) 옹지면 (瓮池面) 동촌면 (東村面) 감산면 (甘山面) 은동면 (銀洞面) 사곡면 (師谷面) 태인면 (泰仁面) 보림면 (宝林面) 옹동면 (瓮東面) 감곡면 (甘谷面) 산외일변면 (山外一邊面) 산외이변면 (山外二邊面) 산내일변면 (山內一邊面) 산내이변면 (山內二邊面) 남촌일변면 (南村一邊面) 고현내면 (古縣內面) 용산면 (龍山面) 북촌면 (北村面) 산외면 (山外面) 산내면 (山內面) 칠보면 (七宝面) 용북면 (龍北面)
태인군(泰仁郡) 18개 면(面) 중에서 인곡면(仁谷面), 흥천면(興天面)이 군내면(郡內面)으로 폐합(廢合)되면서 병합(倂合)되어 태인면(泰仁面)이 되었다. 여기서 인곡면(仁谷面)과 흥천면(興天面)이 옛날 인의현(仁義縣)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인곡면(仁谷面)이 옛날 인의곡면(仁義谷面)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인의현(仁義縣) 구역이 확실시 되는 것이다.
태인면(泰仁面)은 원래 태인군(泰仁郡) 지역으로서 태인 읍내가 되므로 이곳을 군내면(郡內面)이라 하여 백산리(柏山里), 장동(長洞), 원동(元洞), 홍문리(弘門里), 쌍갈리(雙喝里), 사리(四里), 오리(五里), 칠리(七里), 거산리(居山里), 신기리(新基里), 용정리(龍井里), 청석동(靑石洞), 육리(六里), 십리(十里), 십일리(十一里), 내이리(內二里), 사창리(社倉里), 구오리(舊五里), 여속리(餘粟里), 삼오리(三五里)3), 천오리(川五里)의 21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1786년(정조 10)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를 참고하여 행정분리(行政分里)하면 흥천면(興天面)은 상청석동(上靑石洞), 하청석동(下靑石洞), 용정리(龍井里), 내해우리(內蟹隅里), 외해우리(外蟹隅里), 강사교리(江沙橋里), 방종리(方宗里), 천변리(川邊里)로 분리되고, 인곡면(仁谷面)은 고천리(高川里), 관동리(冠洞里), 상증산리(上甑山里), 하증산리(下甑山里), 외산리(外山里), 여속리(餘栗里), 마은동리(馬隱洞里), 이암리(耳岩里), 구은리(九隱里), 성산리(城山里), 백산리(栢山里)로 분리되었다. 이 자료를 대략 간추려 보면, 지금의 낙양리(洛陽里), 오봉리(五峯里)의 청석동(靑石洞)이 흥천면(興天面) 구역으로 추정할 수 있고 고천리(高川里), 증산리(甑山里), 백산리(栢山里)가 인곡면(仁谷面)(仁谷面)으로 옛날 인의현(仁義縣) 구역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곡면(仁谷面: 仁義谷面)의 상증(上甑), 하증(下甑), 구정(九井), 박동(朴東), 박서(朴西), 왕림(旺林), 서주(西走), 고천(高川), 관동(冠洞), 녹동(鹿洞), 이암(耳岩), 낙양(元洛陽), 장수(長水)의 13개 동리(洞里)와 흥천면(興天面)의 내이(內二), 외이(外二), 외신(外新), 낙양(洛陽), 용정(龍井), 하일(下一), 강삼(江三), 궁사(弓四), 천신(天新), 왕천(旺川)의 10개 동리(洞里)와 동촌면(東村面)의 신성(新成), 정동(井洞)의 각 일부와 옹지면(瓮池面)의 소일리(小一里) 일부와 북촌면(北村面)의 일리(一里), 구사(九士)의 각 일부와 고부군(古阜郡) 벌미면(伐米面)의 덕촌(德村), 화천(花川), 회룡(回龍), 강신(江新)의 각 일부를 병합(倂合)하여 태인면(泰仁面)으로 하였다.
동시에 분리(分里)는 11개 리(里)로서 태흥리(泰興里), 태창리(泰昌里), 태성리(泰成里), 거산리(居山里), 궁사리(弓四里), 오봉리(五峰里), 낙양리(洛陽里, 이상 興天面), 백산리(栢山里), 박산리(朴山里), 고천리(高川里), 증산리(甑山里, 이상 郡內面)였다.
태흥리(泰興里)는 홍문리(弘門里), 쌍갈리(雙喝里), 사리(四里), 오리(五里), 칠리(七里), 거산리(居山里) 각 일부(이상 군내면)이고, 태창리(泰昌里)는 신기리(新基里), 용정리(龍井里), 청석동(靑石洞), 오리(五里), 육리(六里), 십리(十里), 십일리(十一里), 거산리(居山里), 내이리(內二里)(이상 군내면), 덕촌(德村), 화천리(花川里) 회룡리(回龍里)(이상 고부군 벌미면(伐米面)) 각 일부이고, 태성리(泰成里)는 사창리(社倉里), 사리(四里), 육리(六里), 칠리(七里), 십리(十里), 십일리(十一里) (이상 군내면) 각 일부이고, 거산리(居山里)는 구오리(舊五里), 육리(六里), 십일리(十一里), 거산리(居山里)(이상 군내면), 신성리(新成里), 용정리(龍井里)(이상 동촌면) 각 일부이고, 궁사리(弓四里)는 강삼리(江三里), 궁사리(弓四里), 외신리(外新里), 외이리(外二里)(이상 흥천면), 이암리(耳巖里)(인곡면), 원동(元洞)(군내면), 일리(一里), 구사동(九士洞)(이상 북촌면), 강신리(江新里)(고부군 벌미면) 각 일부이고, 오봉리(五峰里)는 천신리(川新里), 왕천리(旺川里), 하일리(이상 흥천면), 박동리(朴東里), 박서리(朴西里), 낙양리(洛陽里)(이상 인곡면), 신기리(新基里), 천오리(川五里), 청석동(靑石洞)(이상 군내면) 각 일부이고, 낙양리(洛陽里)는 내이리(內二里), 외이리(外二里), 외신리(外新里), 낙양리(洛陽里), 용정리(龍井里), 하일리(下一里)(이상 흥천면), 신기리(新基里)(군내면) 각 일부이고, 백산리(栢山里)는 백산리(栢山里), 장동(長洞), 원동(元洞)(이상 군내면), 이암리(耳岩里)(인곡면), 일리(一里)(북촌면) 각 일부이고, 장수동(長水洞)(인곡면)이고, 박산리(朴山里)는 구정리(九井里), 박동리(朴東里), 박서리(朴西里), 흥천리(興天里), 궁사리(弓四里)(이상 인곡면), 원동(元洞), 삼오리(三五里), 여속리(餘粟里)(이상 군내면) 각 일부이고, 고천리(高川里)는 왕림리(旺林里), 서주동(西走洞), 고천리(高川里), 관동(冠洞), 녹동(鹿洞)(이상 인곡면), 쌍갈리(雙喝里)(군내면), 소일리(小一里)(옹지면) 각 일부이고, 증산리(甑山里)는 상증리(上甑里), 하증리(下甑里)(인곡면)이다.4)
이때 산외일변면(山外一邊面)․산외이번면(山外二邊面)이 산외면(山外面)으로, 산내일번면(山內一邊面)․산내이변면(山內二邊面)이 산내면(山內面)으로, 남촌일변면(南村一邊面)․고현내면(古縣內面)이 칠보면(七寶面)으로, 옹지면(瓮池面)·동촌면(東村面)이 옹동면(瓮東面)으로, 감산면(甘山面)․사곡면(師谷面)․은동면(銀洞面)이 감곡면(甘谷面)으로, 용산면(龍山面)·북촌면(北村面)이 용북면(龍北面)으로 개편되었다. 서촌면(西村面)·남촌이변면(南村二邊面)이 보림면(宝林面)이 되었다.
1935년 4월 1일 지방 행정구역 재조정 때에 남촌이변면(南村二邊面), 서촌면(西村面)을 구역으로 하는 이웃 보림면(寶林面)을 폐지하고, 보림면(宝林面)의 태서리(泰西里), 매계리(梅溪里), 오류리(五柳里: 이상 西村面), 태남리(泰南里: 이상 南村二邊面)의 4개리를 편입하여 15개리가 되었다.
3. 태인 3․1운동5)
가. 태인 3․1운동 전개과정
1918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은 ‘각 민족은 스스로 민족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를 주창하였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유학생들이 도쿄에 모여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2·8 독립 선언서(獨立宣言書)를 발표하였다. 이 영향으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천도교와 기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 요구를 위한 3.1 운동이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 대표 33인은 명월관(明月館) 지점인 태화관(泰和館)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고, 탑골 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전라북도 내에서는 3월 5일을 기하여 군산, 이리, 옥구, 전주, 태인, 오수, 남원, 만경 등지에서 불꽃처럼 치열한 항일 구국운동이 점화되었다.6)
태인 지역의 봉기는 3월 16일 음력 2월 15일이었으니 태인 장날이었다. 태인면 태인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크게 전개되었다. 태인은 옛날 태인군이 있던 곳이요. 또 호남선 기차가 통과하기도 하는 곳이기 때문에 인물의 왕래와 물화(物貨)의 집산(集散)이 많은 곳이다. 중앙과 어떤 관계로 이루어졌는지 확실한 기록으로 전하는 것이 없으나, 1919년 5월 15일 광주 지방법원 정읍지청 판결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태인에서는 1919년 3월 3일에 고종 황제의 국살에 참여하기 위하여 서울에 올라갔던 송수연(宋洙淵), 김현곤(金玄坤), 박지선(朴址宣) 등이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 등 전라도 출신 인사들을 만나서 3·1운동의 계획을 알고 곧 선언서 등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송한용(宋漢鏞), 송진상(宋鎭相), 오석흥(吳錫興), 송영근(宋榮根), 김진호(金鎭浩), 유치도(柳致道), 김순곤(金淳坤), 송덕봉(宋德奉), 김진근(金鎭根), 백복산(白福山), 김용안(金龍安), 최민식(崔敏植), 김부곤(金富坤) 등과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7)
송수연이 1919년 3월 초순경 태인 읍내의 공고판에 독립선언서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떼어내어 입수하여 3월 5일 22시경 야밤을 틈타서 세 사람이 태흥리 오리부락, 고목(속칭 韓亭子) 밑에서 밀회하여 3월 16일 태인 장날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전개하기고 뜻을 같이하고 인근 지방의 동지들을 규합했다.
제 2절 일제강점기 태인 지역의 독립투쟁
7일부터는 읍원정(挹遠亭)에 근거를 두고 진행 준비를 모의하였는데 이때부터 오성학교 학생인 송문상(宋文相)8), 김달곤(金達坤) 등이 그들과 합류했고, 그 준비로서 시정(詩亭)에서 태극기 약 300장를 만들었으며, 이어서 3․1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군중에게 배부하고자 그 인쇄를 김현곤에게 부탁하였는데, 김현곤은 12, 13일경 밤 신기선(辛基先)과 함께 관할관청의 허가를 받지 않고 그가 근무하는 태인면사무소에서 그곳의 등사판을 이용해 송한용의 집에서 태극기와 손병희 이하 33명의 성명이 열기(列記)된 조선독립에 관한 선언서 약 300매를 인쇄하였다.
송수연은 유치도에게 오석흥의 집의 객문(客問)에는 많은 사람이 오므로 그 집에 위 선언서 20매를 가지고 가 달라고 말하였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 3월 16일 오전 11시경 박지선, 송한용, 송진상 등 청년들은 몇 명씩 짝을 지어 태인면사무소 앞의 우시장(牛市場) 부근에서 종이로 만든 태극기 60장 정도와 독립선언서를 시장에 모인 장꾼들에게 나누어주는 한편, 다른 이들은 보통학교 생도·졸업생 기타 청년들 약 200여명이 면사무소 부근에서부터 큰 소리로 선창(先唱)하고 군중이 이를 따라하는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송연수의 선봉으로 의혈 청년들은 조국광복을 부르짖는 가두연설을 하고 대오를 지어 시위행진을 하니 장날의 장꾼들이 이에 합세하여 순식간에 만세 시위군중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시위대 일부는 주재소 앞에서 시위를 계속하자, 예기치 않았던 군중의 만세 시위에 겁을 먹은 일본 헌병들도 어찌할 바를 몰랐고, 온 시가와 노점 등이 모두 문을 닫은 채 철시(撤市)상태가 되기도 하였다. 군중들은 만세를 외치다가 헌병대와 주재소 등 관공서로 몰려들자 이를 제지하려 주재소 헌병들과 그 보조원들이 발동하여 총을 겨누며 위협하고, 또 조선인 헌병보조원은 시위 군중들을 구타하기도 했는데, 이때 박지선이 타박상을 입고 이밖에도 여러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에 성난 군중들은 조선인 헌병보조원들을 향하여,
“너는 조선 사람이 아니냐?”
“너는 조선 사람이 아니고 왜놈의 개냐?”
하고 호통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군중의 위세에 눌리고, 이에 양심의 가책을 받은 어떤 보조원은 몸을 숨기기도 하였다.
이 운동에서 사법경찰관의 헌병상등병 길전홍태랑(吉田鴻太郞)에 의한 체포고발조서에 따르면
“태인 시장 단속 중 오후 1시가 지날 무렵 태인면사무소 앞의 우(牛)시장 부근에서 다수의 사람의 큰 소리가 발생하고 군중이 이를 따라하는 것을 듣고 그 현장으로 달려갔더니, 약 150명의 사람이 종이로 만든 태극기를 휴대하고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었기에, 그 주동자라 생각되는 송수연 외 3명(김현곤, 김달곤, 송문상)을 체포하고, 또 소지하고 있던 태극기를 압수하였다.”
라고 공술하고 있다.
저들의 이러한 저지에도 굴하지 않고 시위는 계속되었다. 시위 군중들은 다시 성황산(城隍山)과 항가산(恒伽山)으로 모여서 시위를 벌이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저들이 추격해 오면 항가산에서 성황산으로, 또는 성황산에서 항가산으로 옮겨 다니면서 밤이 깊도록 계속했다. 옹동면(瓮東面) 매정리(梅井里) 권사옥(權士玉)은 같은 마을에 거주하는 김승권(金勝權)으로부터 받은 태극기로 옹동면 산성리(山城里) 뒷산(속칭 바르매)에서 마을 사람들과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날 해가 저물어 가면서 밤이 되자 태인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산마루에 횃불이 오르면서 마을마다 수십 명씩 모여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터지고 있었다. 산으로 마을로 메아리쳐 나갔다.
밤을 이용한 산상(山上)의 봉화(烽火)와 “독립만세”의 절규는 10여 일간 이웃마을로 이어져 이 고장 곳곳에서 계속 확산되었다. 3월 21일 새벽 4시경에는 신태인(新泰仁) 방면 산에서 봉화가 오르자 이에 따라 사방(四方)에서 산 위에 불을 놓고 서로 신호를 하였다. 산상에 높이 올려지는 봉화와 밤의 정적을 깨고 울려 펴지는 독립만세의 함성은 보고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층 더 감격시켰다. 동리마다 집마다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크고 작게 울려나왔다. 또 집을 뛰쳐나와서 혹 4, 5명, 혹 수십명씨의 대열이 골목길을 누비며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다. 오후 5시경에는 정읍(井邑) 뒷산에서 봉화가 올랐는데 이날 오후 1시경 태인장에서 또 만세 함성이 올랐던 것이다. 이때 태인 시장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삽시간에 정읍군내 각 고을로 확산되었다. 3월23일 정읍 읍내 거사는 미연에 제지되었으나 4월 2일 덕천면 송기룡(宋基龍), 박재구(朴在求)를 비롯한 정읍 읍내의 군중들이 나서게 되었다. 5월까지 정읍군내에서 일어난 봉기는 31회에 걸쳐 18,000명이 참여하여 1명 사망, 20명 부상, 30명이 피검되었다. 그 만세의 물결이 그 후 십여 일을 두고 계속되었다는 사실에서 태인의 항쟁이 얼마나 집요하고 용감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태인 일대에서 만세시위가 계속되자 일본군경은 일본인 거류민(居留民)까지 동원하여 밤을 새워 가면서 경계하였으며, 또 80여 명의 애국 동포들을 강제 검속하여 정읍 헌병 분대로 압송하기도 했다. 그중에는 태인 보통학교 훈도(訓導, 敎師) 김승호(金昇鎬), 곽장열(郭獎烈)과 옹동면의 면서기(面書記) 송병옥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9)
이 무렵 태인 우편국(郵便局)에서는 칠보면(七寶面) 유생(儒生) 이희섭(李喜燮)이 창덕궁(昌德宮) 황제(皇帝)께 보낸 서신 한 통이 발견되어 한때 저들을 당황하게 하였으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각국의 승인(3․1 독립선언)이 만약 형편 좋게 안 되는 때에는, 비록 약력(弱力)이지만 군병(軍兵)을 일으켜 강하게 경성(京城)을 쳐서 금번 거사에 발각되어 체포 인치(引致)중인 인명을 구출하고, 이들을 지나출병(支那出兵)에 가담하게 하며 또 조선 20만 인을 군사로 일으켜 일본을 구축하고, 독립을 성공해서 왕실(王室)을 복벽(復壁)하며 또 옛날 정치로 회복케 하려 하오니, 후일 군사를 일으킬 때에는 잊지 마시고 남방대원수(南方大元帥)에 하명하여 주시기 바라나이다. 일본의 장병을 두려워하지 마시며, 정신을 송죽(松竹)과 같이 변치 마시고, 민심의 원한을 씻어주려 하신다면, 유명한 참모와 유지(有智)의 장군은 그 수를 알 수 없을 것이오니 부디 잊지 마시고 명심하여 주심을 천만 복망하나이다.”10)
한편 태인만세운동으로 하여 전후 일본에 검속당한 애국 동포들은 저들의 갖은 고문과 곤욕을 받았지만, 끝내 기개를 굽히지 않고 일 헌병 및 법관들에 항쟁하였으며, 가족들도 온갖 곤욕과 학대를 당하면서도 적개심을 버리지 않았다.11)
태인 일대에서 일본에 의해 검속되어 대부분 광주지방법원 정읍지청에 송치되었다. 헌병대를 거쳐 정읍 검사국으로 송치된 사람은 송연수 등 25명이었는데, 5월 15일 정읍재판소 1심 판결에서 징역형과 태형, 구류 등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송한용(宋漢鏞) 정읍․영광 등지에서 군자금 7,000엔(円)을 모집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연락원인 국창현(菊昌鉉)을 통하여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했다.12)
만세 시위의 주도 인물은 연령상 19세에서 36세로 2, 30대가 주류를 이루며, 그것도 30대는 구속된 인사 25명 가운데 3명에 불과하였다. 계층별로 볼 때 소위 ‘지식인’으로 불리는 보통학교 교사, 학생 혹은 졸업생, 면서기와 같은 하급관리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을 포함하는 민중들이 다수였다. 특히, 주도 인물들이 다소나마 신교육을 받은 인물들이었다는 점과 3․1운동 당시 면사무소가 시위대들의 주된 공격 대상이었는데, 태인 3․1운동에서는 면서기가 만세 시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이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태인면 성황산에 있는 태인 3․1운동기념탑은 태인 성황산 남쪽 고지에 1919년 3․1운동 때 태인지방의 봉기를 기념하고 선열들의 3.1운동 정신을 계승발전 시키고자, 주민들의 성금 출연과 군비 보조로 1884년 3월 1일 현 위치에 기념탑을 건립하고 매년 3월 1일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나, 기념탑의 붕괴위험이 있어 2003년 12월 10일 국비 3천만 원과 시비 3천 5백만 원 포함 6천 5백만 원의 예산으로 기념탑 복원과 함께 25분의 위패 봉안소를 건립하여 매년 3․1절 기념행사 및 참배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또한 2005년도에는 익산보훈지청으로부터 국비 3천만 원을 지원받아, 태흥리 오리마을에 만세비를 설치하고 3.1운동 밀회장소를 정비하였다.
3ㆍ1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큰 역할을 했던 청년과 학생들은 독립청원(獨立請願)이라는 대외의존적인 태도를 지녔던 민족대표들과는 달리 민족의 주체역량으로 독립을 쟁취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운동은 3월 중순 이후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노동자ㆍ농민ㆍ중소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민중운동(民衆運動)으로 발전되었으며, 3.1운동은 비록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민족정신을 선양하고 독립의식을 환기시켰으며 민족의 잠재적인 역량을 과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자못 큰 것이고 3.1운동의 참여를 통해 형성된 민중의 자주의식은 이후 태인지역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이 지속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표 7-7, 8>, <그림 7-1, 2, 3>
나. 옛 태인 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13)
현재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105 일대
당시주소: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읍 태성리
종 류: 시장
위치고증: 『신기선 등 판결문』에 관련 내용과 시위장소가 기록되어 있다. 옛 장터의 위치는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송한용의 딸 송영순을 비롯한 여러 주민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상태: 멸실(滅失), 당시에는 피향정 주변에 큰 규모의 장이 섰으나 해방 후 이전하였 다. 도로가 개설되어 옛 장
터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다. 태성리 성황산 자락에 3․1운동 기념탑(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
호 51-1-9)이 있다.
<그림 7-1> 옛 태인 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표 7-7> 전북지역 3·1운동의 일지 중에서14) | ||||
시 기 |
지 역 |
인 원 |
주 도 계 층 |
운 동 상 황 |
3월 16일 |
정읍군 태인면 |
3,000 |
유생, 천도교, 학생 |
만세시위 |
3월 21일 |
정읍군 태인면 |
수천 |
주민 |
만세시위 |
<표 7-8> 태인 3·1운동 의거 인물 | ||||||
성 명 |
생몰기간 |
주 소 |
독립유공자 관리번호 |
판결 결과 |
훈 격 |
수훈 연도 |
송수연 (宋洙淵) |
1895. 12. 5. ~1951. |
본적-증산리, 주소-옹동면 상산리 |
징역 2년 |
|
| |
김현곤(金玹坤) |
1900. 3. 3. ~1955. 1. 21. |
본적-태흥리 592, 주소-박산리 15인회 회장(서훈번호 3-213) |
1539 |
보안법 위반 징역 1년 6월 19190702 대구복심법원 |
건국훈장 애족장 |
1990 |
송한용(宋漢鏞) |
1893. 9. 18. ~1967. 6. 8. |
태창리 85(서훈번호 3-224) |
1701 |
보안법 위반 징역 10월 19190515 정읍지청 |
건국훈장 애족장 |
1990 |
백낙두(白樂斗) |
미 상 |
태인보통학교 교사 |
징역 8월 |
|
| |
송덕봉(宋德奉) |
1895. 10. 8. |
태흥리 |
보안법 위반 징역 8월 19190515 정읍지청 |
|
| |
송진상(宋鎭相) |
1901. 2. 15. ~1962. 9. 23. |
태흥리 458 |
962021 |
보안법 위반 징역 8월 19190515 정읍지청 |
대통령 표창 |
2007 |
신영식(辛泳寔) |
1899. 9. 6. |
태흥리 |
징역 8월 |
|
| |
박지선(朴址宣) |
1894. 5. 20. ~1966. 8. 7. |
태성리 360 |
425 |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19190515 정읍지청 |
대통령 표창 |
1992 |
백복산(白福山) |
1890. 1. 28. |
태성리 |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19190515 정읍지청 |
|
| |
송영근(宋榮根) |
1897. 7. 20. ~1942. 6. 11. |
본적-산내 종성, 주소-태흥리 323 |
3416 |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19190515 정읍지청 |
대통령 표창 |
1992 |
오석흥(吳錫興) |
1893. 1. 9. ~1921. 2. 6. |
태성리 221 |
4042 |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19190515 정읍지청 |
대통령 표창 |
1992 |
백학진(白鶴辰) |
1896. |
태성리 |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19190515 정읍지청 |
|
| |
송근상(宋根相) |
1893. 7. 21. ~1952. 7. 17. |
본적-태성리, 주소-대부구 시장정 |
32021 |
보안법 위반 징역 3년 집행유예 2년 19190929 대구지방법원 |
대통령 표창 |
2005 |
유치도(柳致道) |
1901. 3. 14. |
태흥리 |
보안법위반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 19190515 정읍지청 |
|
| |
김부곤(金富坤) |
1901. 5. 7. |
태흥리 |
기소유예 |
|
| |
김진근(金鎭根) |
1901. 3. 18. |
태흥리 |
기소유예 |
|
| |
오철수(金鎭根) |
1899. 5. 22. |
태흥리 |
기소유예 |
|
| |
김용안(金龍安) |
1887. 4. 11. ~1926. 4. 29. |
태성리510 |
35773 |
보안법 위반 태(笞) 90 度 19190515 정읍지청 |
대통령표창 |
2015 |
김진호(金鎭浩) |
1891. 9. 25. ~1945. 7. 24. |
태흥리 275(서훈번호 3-210) |
1790 |
보안법 위반 태(笞) 90 度 19190515 정읍지청 |
건국훈장 애족장 |
1990 |
최민식(崔敏植) |
1892. 8.10. ~1943. 11. 27 |
본적-옹동면 칠석리, 주소-태흥리 |
보안법 위반 태(笞) 90 度 19190515 정읍지청 |
|
| |
권사옥(權士玉) |
1883. 10. 5. |
옹동면 매정리 |
구류 20일 |
|
| |
김승권(金勝權) |
1902. 12. 24. |
옹동면 매정리 |
구류 20일 |
|
| |
송순용(宋順鏞) |
1882. 9. 9. |
태흥리 |
구류 20일 |
|
| |
윤상홍(尹尙弘)
|
1850. 2. 28. |
궁사리 |
구류 20일 |
|
| |
김달곤(金達坤) |
1896. 8. 6. ~1920. 7.12 |
태흥리 457, 오성학교 학생 |
1559 |
대구복심법원 2심 무죄, 병보석 5일만에 사망 |
대통령표창 |
2007 |
송문상(宋文相) |
1896. 12. 2 |
태흥리, 오성학교 학생 |
대구복심법원 2심 무죄 |
|
| |
박지일(朴地壹) |
당시 26세 |
태흥리 |
징역 6월 보안법 위반 19190515 정읍지청 |
|||
김진홍(金鎭洪) |
당시 29세 |
태흥리 |
태(笞) 90 度 보안법 위반 19190515 정읍지청 |
|||
송영초(宋榮招) |
당시 29세 |
본적-산내 종성리, 주소-태흥리 |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19190515 |
|||
신기선(辛基先) |
당시 22세 | 태흥리 |
보안법 위반 징역 8월 19190515 |
|||
송은상(宋銀相) |
당시 18세 | 태성리 |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19190515 정읍지청 |
|||
참고문헌 및 자료 :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1994). 『受刑人名票』(井邑郡 瓮東面長, 1977).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金承學,『韓國獨立史』(1970). 李龍洛,『三・一運動實錄』(1969). 『정읍항일운동사』(정읍문화원, 1994). 『전북의 3․1운동』(전북인권선교협의회, 2001). 유원아, 「전북 지역 3․1운동의 전개와 그 성격」, (2002) |
<그림 7-2> 3․1운동 때 일제의 재판 광경15)
<그림 7-3> 태인 3․1운동 기녑탑16)
4. 미륵불교(彌勒佛敎)의 일망무지론(日亡無地論)
미륵불교는 증산교 분파의 하나이다. 정인표(鄭寅杓)는 전라북도 완주 출신으로 미륵불이 출세한다는 믿음과 함께 도통입명(道通立名)에 뜻을 두게 되어 틈틈이 수양생활을 계속하던 어느 날 태양이 입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얼마 뒤 다시 선관(仙官)이 나타나 미륵산(완주 母岳山)으로 가라는 계시를 내려주었다고 한다.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의 미륵산 산제당에서 오주문(五呪文)으로 치성을 드린 결과, 사흘 뒤인 1934년 1월 천신으로부터 도통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정인표는 미륵불의 성령이 자기에게 접응되었으므로 자신은 곧 인불(人佛)이라 자처하면서 그 길로 하산하여 과거 김형렬(金亨烈)이 이끌었던 신도들을 규합하여 미륵불교의 재기를 꾀하며 포교활동을 하였다.
1933년 7월 15일 교도(敎徒) 이진호(李鎭浩, 신태인읍 백산리) 집에서 신도공사(神道公事, 미륵불교의 행사)를 강론하는 자리에서 일본(日本)에 ‘死’자(字)를, 조선에 ‘生’자(字)를, 소화(昭和, 일본 천황의 연호)에 ‘落’자(字)를 각각 붙이고 일망무지(日亡無地, 일본이 망한다.)라고 하였다. 즉, 일본은 죽고 조선은 살고 소화는 떨어지고 일본은 망한다는 뜻이었다. 천지(天地)는 선(善)한 자에 복(福)을 주고 악한 자에 화(禍)를 주나니 일본은 결국 망하게 되므로 우리는 조국광복을 위하여 성심껏 기도를 계속하자고 하였다.
그런데 이 가운데 일본 경찰의 첩자로 김병환(金炳煥, 김제 금산면 용화동)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김제경찰서 양재홍(楊載弘)에 밀고하여 전북도 경찰부(警察部)에서는 각 경찰서로 지시하여 1940년 12월 15일 오전 5시를 기하여 미륵교에 체포령이 내렸다. 이때 김제, 정읍, 부안, 고창, 진안, 장수, 영광 등지의 교도 42명이 구속되었는데 이 가운데 재판소의 형을 받은 사람은 다음과 같다.17)
<표 7-9> 일망무지론 사건 재판결과18) | |||
성 명 |
재판 결과 |
성 명 |
재판 결과 |
정인표(鄭寅杓) |
1898.12.22~1957.5.30 태성리 642 황실불경죄, 육해군형법․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8년 애족장(1997) 관리번호 5639 |
정봉진(鄭奉辰) |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1년 |
서보인(徐輔仁) |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2년 6월 애족장(2004) |
오귀룡(吳貴龍) |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1년 6월 애족장(2005) |
정공일(鄭公一) |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5년 |
정재관(鄭在寬) |
치안 유지법위반, 무죄 |
장득원(張得遠) |
1987.1.12.~1973.11.7. 태성리441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3년 애족장(1997) 관리번호 5631 |
권성옥(權城玉) |
치안 유지법위반, 기소유예 |
이진호(李鎭浩) |
1895.2.25.~1970.9.10. 백산리 28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5년 애족장(2008) 관리번호 6002 |
박병원(朴炳元) |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1년 병보석 |
이종후(李宗厚) |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1년 |
정갑석(鄭甲錫) |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2년 6월 |
권중기(權重琦) |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1년 6월 |
박재춘(朴在春) |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3년 |
강복수(姜福秀) |
치안 유지법위반, 병보석 사망 |
곽조흥(郭組興) |
치안 유지법위반, 병보석 사망 |
이정수(李貞守) |
치안 유지법위반, 기소유예 |
박내현(朴乃賢) |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1년 |
여성백(余性白) |
1899. 4. 15~1944.5.19.태성리 225,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3년, 복역중 사망, 애족장(1997) 관리번호 5630 |
정동훈(鄭東勳) |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사망 |
이창구(李昌九) |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3년 |
정인명(鄭寅明) |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4년 |
류경홍(柳慶洪) |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1년 6월 |
김덕재(金德載) |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2년 |
한동환(韓東煥) |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2년 |
변성찬(卞城贊) |
치안 유지법위반, 기소유예 |
임영생(林永生) |
치안 유지법위반, 기소유예 |
김기부(金基孚) |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1년 |
김성학(金聖學) |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1년 |
좌우찬(左右贊) |
치안 유지법위반, 기소유예 |
김형경(金炯鏡) |
치안 유지법위반, 병보석 사망 |
양군오(梁君五) |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1년 |
황인수(黃仁秀) |
치안 유지법위반, 병보석 사망 |
고상희(高尙熙) |
치안 유지법위반, 기소유예 |
김영신(金永信) |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2년 |
이경표(李京杓) |
치안 유지법위반, 기소유예 |
김재덕(金在德) |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2년 6월 |
장경도(張敬道) |
치안 유지법위반, 무죄 |
김영희(金永禧) |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2년, 병보석 사망 |
김대홍(金大洪) |
치안 유지법위반, 기소유예 |
정휴철(鄭休哲) |
치안 유지법위반, 징역 4년 |
박종상(朴鐘常) |
치안 유지법위반, 병보석 |
이후 이들은 ‘일망무지(日亡無地)’라는 깃발을 들고, 일본이 망하고 곧 밝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며 포교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도 포교활동을 계속하여 많은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1950년 정읍군 태인면 태성리에 교당(敎堂)을 짓고 미륵불영원회(彌勒佛永園會)라는 간판을 걸었다. 그는 포교활동과 더불어 아동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인재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고 1951년에는 명륜 고등공민학교를 인수하는 등 교화교육도 병행하였다.
또 1952년에는 미륵불을 주불로 하고 석가와 공자를 모시는 신앙의 체계를 확립하는 한편, 본부를 태인면 태흥리로 옮겨 대성미륵대장전, 명부전, 칠성전을 건립하는 등 교화의 터전을 굳게 하였다.
1955년 교조 정인표가 사망하면서 정공일(鄭公一)―한동환(韓東煥)―정휴규(鄭休圭)―김연봉(金連奉)―이원장(李沅璋)으로 교조가 이어지고 있다. 정공일 생존당시 김흥수(金興洙)가 미륵불교라는 이름으로 분파하기도 하였으나, 뒤에 두 파는 다시 합쳐져 미륵불교로 문교부에 등록하였다.
현 대표는 1984년에 제5대 대표로 취임한 이종도 대종법사이며, 1997년 현재 전국 16개 지부에 1만 8,750명의 신도를 가지고 있다. 신앙의 대상은 미륵불(彌勒佛: 姜一淳)이고 석가상(釋迦像)과 공자상(孔子像)을 받들고 있다.
또, 삼계도솔신장(三界兜率神將)·용화불토왕대신(龍華佛土王大神)·아미불상(阿彌佛像: 교조정인표)도 봉안하며 그 밖에 휴정(休靜)·유정(惟政)·이순신(李舜臣)·송구봉(宋龜峰)·김일부(金一夫)·전명숙(全明淑: 全琫準)·최제우(崔濟愚, 호는 水雲) 등 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숭배한다.
미륵불은 대도의 근원인 선기(仙氣)로서 천계탑(天階塔)에 내려와 인간의 대도를 창설한 강일순이며, 정인표는 바로 이 미륵불의 자식으로 후천을 담당할 인물이라는 것이다.
수련의 목표는 대인대의수정(大人大義守正)·오상선행(五常善行)·지은보은(知恩報恩)이며 중요 의례로는 춘분, 하지, 추분, 동지에 지내는 사대절후(四大節候) 치성(致誠)과 칠성(七星) 치성, 명부(冥府) 치성 등이 있다. 주요 경전은 『교리정전 敎理正典』·『삼강대전 三綱大全』·『명관대전 明觀大全』등이 있다.
5. 그 외 독립유공(獨立有功) 포상자(褒賞者)19)
<표 7-10> 독립유공 포상자 | |||||
유공자명 |
서 훈 |
운동 계열 |
출신지(주소지) |
서훈 번호 | |
훈 격 |
년 도 | ||||
박봉래(朴琫來) |
애 국 장 |
1990 |
만주방면 |
김제 봉남369 (태인 매계374) 1880.4.6.~1950.8.5. |
(관리번호 1475) |
김천술(金天述) |
애 국 장 |
1991 |
계몽운동 순절(殉節) |
태인, 1881.11.14.~1910.8.9. 1910년 8월 9일 순절 |
1-131 (관리번호 7745) |
노한문(盧漢文) |
애 국 장 |
1991 |
의병 |
태인 고현 흑동 교수형(絞首刑) |
9-617 |
김황국(金愰國) |
애 족 장 |
1995 |
의병 |
태인, 義兵將 |
95, 공적서 4-329 (관리번호 10326) |
권금암(權今岩) |
애 족 장 |
1996 |
의병 |
태인 고현내 원촌 |
95, 공적서 4-59 |
김응수(金應水) |
애 족 장 |
2003 |
의병 |
태인 고현내 은석 |
(관리번호 950596) |
김자화(金子化) |
애 국 장 |
2015 |
의병 |
태인 홍천 홍촌 |
(관리번호 951909) |
6. 민족말살의 황민화 정책
일본은 1937년 중․일 전쟁을 계기로 만주와 중국 본토 등 대륙침략을 본격화하였다. 나아가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의 주역이 되었으며, 전쟁은 극도로 치달았다. 이 시기에 한국에 대한 식민통치는 가장 극도에 달하는 탄압정책을 적용하게 된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전쟁 물자를 공급하는 군수물자 보급창화(補給廠化)하고 나아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말살하여 아예 일본민족에 통합하려는 민족말살정책(民族抹殺政策)을 추진하였다.
1936년에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그 전 총독시대부터 실시해 온 내선융화(內鮮融和)정책을 보다 강화하고, 선만일여(鮮滿一如), 일시동인(日視同人) 등의 민족말살 정책을 점차 확대해 나갔다. 민족말살정책을 위해 밖으로 내세운 정강이 황국신민화정책(皇國臣民化政策)이었다.
황국신민화정책은 한국인을 일본 천황의 신민(신하된 백성)으로 만드는 일종의 민족말살정책이다. 이를 위해 1면(面) 1신사(神社) 정책으로 전국 곳곳에 신사(일본의 토속종교인 신도(神道)의 사당)를 설치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하였다. 또한 모든 행사에 앞서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제창하도록 강요하였다. 1938년에는 ‘국체명징(國體明徵), 내선일체(內鮮一體), 인고단련(忍苦鍛鍊)’의 3대 강령을 표방하고 한국학생의 황국신민화를 추진하였다.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학교의 이름과 교육과정 등을 일본 본국 학교와 같게 하였고, 조선어과를 폐지하여 조선어와 조선 문자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역사교육에서도 한국사 대신 일본사를 가르쳤다. 군사면에서는 육군지원병제도를 채택하여 한국인을 전쟁터로 끌어가기 시작하였다. 나아가 국가총동원법, 군수공업총동원법을 제정하여 당시 수행중인 중일전쟁을 위해 한국의 인력, 자원, 물자 등을 총동원하였다. 이를 위해 어용단체인 조선연맹을 조직하여 대국민 세뇌운동을 벌였다. 1939년에는 창씨개명(創氏改名)제도를 신설하여 한국인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침략하고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일본은 한국인을 자기들의 전시체제 속에 끌어들이고, 한국인을 전쟁 수단으로 이용하는 극도의 비도덕적 행위를 자행하였다. 1940년에는 전쟁을 위한 정신적인 총동원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을 조직하고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전개하였다. 황국신민화정책은 전쟁이 확대되면서 이에 비례하여 강화되었는데,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향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민족말살정책 추진이다. 앞서 말한 각종 교육정책, 창씨개명 등에 이어 한국인의 문화적 저항운동도 그 근본부터 제거하였다. 한글 탄압에 저항하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와 한국 역사 탄압에 항거하는 진단학회(震檀學會)를 해산하는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둘째, 전쟁을 위한 인적자원 동원이다. 전쟁터로의 군인 징발은 물론, 탄광이나 건설 현장으로의 노동력 징발이 성행하였고, 심지어 부도덕의 극치로 세계에 알려진 일본군위안부를 조직해 젊은 여성들을 일본군의 성노예로 삼는 등 인권을 유린하였다.
셋째, 전쟁을 위한 물자 징발이다. 전쟁을 위해 한국인의 각 가정으로부터 놋쇠제품이나 기름을 징발해가는 극도의 착취를 자행하였다. 이는 총알이나 대포 제조, 항공유 공급을 위한 것이었다.
결국 황국신민화정책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말살하여 일본이 전쟁을 위해 한국인을 마음대로 동원·사용할 수 있는 전시 식민지정책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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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떡잎식물. 벼목 화본과의 한해살이풀로 원산지는 동부 아시아. 낱알은 좁쌀이라고 부르며, 밥에 넣어 먹으면 아주 약간 고소해진다. 곡식으로 쓰는 종류는 크게 차조와 메조로 분류된다. 낱알이 정말 작아서 거의 볼펜에 들어가는 구슬과 크기가 비슷하다. 삼국시대 고구려에서 평민들의 주식으로 사용되었던 곡식.* 북부지역은 차가운 기후 때문에 쌀농사가 잘 되지 않아 쌀은 귀족들의 차지였고, 평민들은 좁쌀 밥을 먹었다. 일제강점기에 한동안 조밥이 빈민층의 주식이 되었던 적이 있는데 일본에서 쌀 부족 현상이 심화됨에 따라,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일본으로 쌀을 대량으로 수출하다보니 정작 조선에서 그 양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실례로 삼성의 이병철이 일제 때 조선의 쌀을 도정한 후 일본으로 수출해서 번 자본으로 삼성의 기반을 닦았다. 19세기 아일랜드와 영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었다. 쌀 대신 밀, 조 대신 감자로.
2) 1914년 4월 1일 이전 기준.
3) 최현식편, 『增補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74. 3.), 89.
4) 최현식편, 앞의 책, 89∼90.
5) 1919년 3월 16일 전북 정읍군 태인에서 金炫坤.宋洙淵.宋漢鏞 등 주도로 장날을 이용, 200여 명이 만세시위 거사. 『한민족독립운동사 3 –3.1운동』(국사편찬위원회, 초판, 1988), 378.
6) 『내고장 傳統文化』(정읍군, 1983), 181.
7) 李治白, 『全北地域獨立運動史』 (全北域獨立運動追念塔建立委員會, 2004), 261.
8) 아들 송희석(69)은 “부친은 일찍이 독립사상을 싹틔웠으며 국장에 참여하여 송진우, 김성수 등을 만나 3․1운동이 일어남을 통보 받고 낙향하여 친형 송근상, 송진상, 김달곤 등과 만나 거사를 모의하였으며 태극기 제작 경비를 조달한 주동자였다고….”라고 주장하고 있다.
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3권 (1972), 510~511.
10) 朴成壽, 『獨立運動史 硏究』, (創批新書, 1980), 330.
1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3권: 삼일운동사(하)』(독립유공자 사업기금 운용위원회, 1970), 509~ 512.
12)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admNum=1701)
13) “전라북도 독립운동사적지”, 『국내 항일운동사적지 보사보고서』 7,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 사연구소, 2010), 406.
1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3권 (1972), 483~553.
이용락, 『3․1운동실록』(도서출판 금정, 1994), 565~599.
김진봉, 『3․1운동사연구』(국학자료원, 2000), 91.
15) 李治白, 『全北地域獨立運動史』 (全北域獨立運動追念塔建立委員會, 2004)
16) 2014년 7월 7일 촬영.
17) 개편 정읍시사 발간추진위원회, 『개편 정읍시사(井邑市史)』상 (2010), 336.
18) 『井邑 抗日運動史)』(정읍문화원, 1994), 188~189.
19) 개편 정읍시사 발간추진위원회, 앞의 책, 340. 『井邑의 歷史와 文化』(정읍문화원, 1999), 4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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