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근대(近代)와 태인
제 1절 근대사회와 태인
1. 대원군(大院君)의 개혁정치(改革政治)
대원군은 영조(英祖)의 5대손으로 20살에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도총관(都摠管) 등 한직(閑職)을 지내면서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勢道政治) 밑에서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1863년(철종 14)에 후사(後嗣) 없이 철종이 죽자 조대비(趙大妃, 익종비(翼宗妃))에 의해 그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 고종(高宗))이 즉위하게 되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 봉해진 그는 어린 고종(高宗)의 섭정(攝政)까지 맡게 된다.
이로부터 대원군은 10년간의 집정시대(執政時代)를 맞아 안동 김씨의 세도를 제거하고 당쟁의 악습을 없애기 위해 사색(四色, 남(南)·북(北)·노(老)·소(少))을 신분·계급·출생지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등용했으며, 부패관리(腐敗官吏)를 적발(摘發)·파직(罷職)시켰다. 국가재정을 좀먹고 당쟁의 소굴이 되고 있는 서월(書院)을 47개만 남겨놓고 모두 철폐(撤廢)하고 세제(稅制)를 개혁(改革)하는 등 과감한 개혁정치(改革政治)를 추진함으로써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고도 충실하게 만들었다. 이때 전라도에서는 서원이 셋만 살아남았는데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과 사우(祠宇)인 광주 표충사(褒忠祠) 그리고 전북에 남은 유일한 서원이 무성서원(武城書院)이다.
또한 『대전회통(大典會通)』, 『육전조례(六典條例)』 등의 법전을 편수, 간행하여 법률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정치기강을 수립하는 한편,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와 삼군부(三軍府)를 부활시켜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하는 등 군제를 개혁하여 왕권 강화를 위한 조치를 취해갔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景福宮)을 중건(重建)하면서 재정적 적자를 보충하기 위하여 결두전(結頭錢)을 비롯하여 원납전(願納錢),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하면서 민생을 어렵게 만들었다.
천주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외국인 선교사를 죽임으로써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일으킨 데 이어, 국제 정세에 어두운 나머지 쇄국정책(鎖國政策)을 고집하여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등을 일으켜 국제 관계(國制關係)를 악화(惡化)시키고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지게 했다.
이러한 실정은 국민의 원성을 사서 마침내 최익현(崔益鉉) 등 유림의 탄핵으로 집권 10년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조선의 정국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어 대원군이 물러나고 며느리인 명성황후(明成皇后)에게 실권이 넘겨졌다. 명성황후가 집권하게 되자, 안으로는 친족 세도정치의 제현으로 내정이 부패되고, 밖으로는 자주성을 상실한 문호개방정책으로 말미암아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받아들여 한반도를 비롯한 대륙 침략의 터전을 마련해 주게 되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이 체결된 후 미국과 국교를 맺은 이래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조약을 맺어 우리나라는 마침내 세계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외세의 위협을 맞아 위정척사(衛正斥邪)를 부르짖는 세력이 대두됨에 따라 국론이 개화(開化)와 척사(斥邪)로 엇갈려 정계에 혼란이 일어났으며, 침략의 야심을 품은 일본과 청(淸)의 대립으로 이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러한 속에서 임오군란(壬午軍亂)과 갑오정변(甲午政變)이 일어나 조선은 대내외적으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2. 갑오동학농민혁명(甲午東學農民革命)과 태인
문호개방 이전부터 조선 후기 사회에 있어 중세적인 통치체제의 모순에 대항하는 민란(民亂)이 꾸준히 일어나는 가운데, 1876년 개항이 이루어진 이래 일본의 경제적 침투가 계속됨에 따라 농민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더욱이 지배층의 분열과 부패한 관리들의 횡포는 농민들의 살림살이를 막다른 위기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가운데 삼남지방(三南地方)의 민란사건(民亂事件)이 잇따라 일어나고 또 동학교도(東學敎徒)들의 교조(敎祖) 신원운동(伸冤運動)이 이에 가세하여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은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은 부임하자마자 만석보(萬石洑)의 수세(水稅)를 비롯하여 온갖 부당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등 농민에 대한 착취를 일삼았다. 이에 분노한 1천 명의 농민들은 전봉준(全琫準)을 중심으로 들고일어나 1894년 2월 15일(이하 양력) 관아를 습격, 세미(稅米)를 빈민에게 나누어주고 만석보(萬石洑) 저수지(貯水池)를 파괴한 후 해산했다. 그러나 안핵사(按覈使)1) 이용태(李容泰)가 봉기한 농민을 동학의 폭도로 몰아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자 다시 분격한 농민들은 4월 하순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왜척양(斥倭斥洋)』의 기치를 내걸고 백산(白山)으로 진격, 인근 농민 수천 명의 호응을 얻었다.
농민군은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金開南)·손화중(孫和中)을 장령(將領)으로 삼고, 규율과 체제를 엄격히 하는 동시에 ①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치 말 것, ②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濟世安民)할 것, ③왜병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밝힐 것, ④서울로 쳐들어가서 권력자들을 소탕할 것 등의 4대 강령을 선포했다. 그런데 동학교주 최시형(崔時亨)은 이러한 혁명군의 움직임에 대해 접주(接主)들에게 통문을 보내 「도(道)로써 난(亂)을 지음은 불가한 일」이라며 전봉준 등을 공격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농민전쟁은 이미 동학교단의 상층부와 상관없이 광범한 민중의 지지를 받으면서 발전해 나갔다. 이때, 전봉준의 통문(通文)을 받고 태인·무장·금구·부안·고창·홍덕 등의 동학 접주(接主)들이 각기 병력을 끌고 백산으로 모여들었는데 그 수가 1만 명에 가까웠다.
농민군은 5월 11일 전주에서 온 관군과 보부상군(褓負商軍) 수천 병력을 황토현(黃土峴) 싸움에서 깨뜨리고, 무장·영광으로 진격하여 부패관리들을 숙청했으며, 5월 31일에는 전주를 점령했다. 그러자 정부의 요청으로 6월 8일 청나라 원군이 아산만에 도착하고, 뒤따라 일본은 톈진 조약을 내세워 출병을 결정했다. 이에 혁명군은 정부와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고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 12개조를 타협한 후 전라도 53군에 농민적 자치기관이라 할 수 있는 집강소(執網所)를 세워 폐정개혁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 휴전은 혁명군에게 불리하여, 정부는 강화조약을 이행하지 않는 한편, 청나라의 원군을 불러들임으로써 마침내 청·일전쟁의 계기를 스스로 만들었다.
이에 동학군은 10월 12일 삼례집회를 시발로, 전봉준을 위시한 강경파는 최시형(崔時亨) 등 북접교단(北接敎壇) 온건파의 타협론(妥協論)을 거부하고 북상(北上)을 결정함으로써 전국적인 농민전쟁으로 발전했다. 전봉준의 10만 호남군과 끝내 호응한 북접의 손병희(孫秉熙)가 이끄는 10만 호서군은 3로(路)로 나누어 논산에 집결한 후 대본영(大本營)을 설치하고, 10월 21일 공주의 우금치 고개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과 결전, 분투를 거듭했으나 근대적인 훈련과 장비를 갖춘 일본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혁명군은 곧 전라도로 후퇴하여 재기를 꾀했으나 11월 27일 태인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여 동학농민군 주력부대가 해산되었고, 12월 1일에 김개남이 태인 산내면 종송리(山內面 種松里)에서 11월 30일부터 추적해온 강화 병방(江華兵房) 황헌주(黃憲周)와 전초대관(前哨隊官) 박승규가 이끄는 관군 80명과 포교 3명에게 체포되고 12월 2일 순창 피노리에서 전봉준이 체포됨으로써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표 7-1> 가. 동학농민군의 최후(最後)의 격전(激戰) - 태인(泰仁) 성황산(城隍山) 전투(戰鬪)와 농민군(農民軍) 해산(解散) 동학농민군의 공주영(公州營) 공격을 10월 23일부터 이인(利仁), 대교(大橋), 효포(孝浦), 능치(崚峙) 등의 전투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해 오다가 11월 9일 공주의 우금치전투(牛金峙戰鬪)에서 패하여 노성(魯城)으로 후퇴했다. 한편 김개남(金開南)은 남원에서 전주를 거쳐 금산에 진출하여 공주싸움에는 참가 하지 않고 청주로 진군했다. 5천군을 거느리고 우금치싸움이 있는 다음 10일 진잠(鎭岑)을 거쳐 11일에는 회덕 신탄진(懷德 薪炭津)을 경유하여 13일 새벽 청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의 저항에 실패하고 남하했다. 노성으로 후퇴한 전봉준은 노성에서 전력을 재정비하여 공주영을 다시 공격할 계획이었으나 치명적인 참패로 다시 진격할 여력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이인(利仁), 효포(孝浦), 능치(崚峙)싸움에서 경천(敬天)과 노성으로 후퇴했다가 다시 공격하는 전법이었다. 그런데 동학농민군의 동태를 살핀 일본군은 추격전으로 나섰다. 일본군의 추격으로 전봉준은 노성에서 논산으로 후퇴했다가 다시 황화대(黃華臺: 지금의 烽火山, 忠南 論山郡 論山邑 登華里)로 옮겼다. 11월 16일(陰 12월 12일) 남하 도중에 논산 황화대전투에서 일본군 모리[森尾] 부대와 이두황(李斗瑝: 壯衛營軍)의 공격을 받아 많은 희생을 내고 또 남쪽으로 후퇴했다. 전봉준은 패잔군 3천명을 거느리고 전주성에 돌아와 선화당(宣化堂)에서 며칠을 지냈다. 농민군은 11월 하순 전주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계속되는 패배로 이미 동학농민군의 전력과 사기는 크게 꺾였고, 일본군이 그 뒤를 추격해 오는 급박한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동학농민군은 전주에서 군대를 나누어, 전봉준․손병희는 고부방향으로, 김개남은 남원방향으로 분산하여 이동하였다. 패주하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이 추격해오자 23일 금구, 원평으로 후퇴했다. 그리하여 원평에서는 11월 25(양 12월 12일)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경까지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농민군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고 관군의 공격에 속절없이 대오가 붕괴된 농민군은 참패하여 다시 남쪽으로 20리 거리의 태인으로 후퇴했다. 전봉준은 제1차 재판에서 “금구에 이르러 다시 의병을 모집해 수효는 불었으나 기율이 없어 다시 개전하기가 곤란했는데 일본병이 추격해 와서 두 번 싸우고 해산했다.” 진술했다. 원평과 태인 전투를 말한 것으로, 이 태인 전투가 전봉준이 이끈 마지막 전투였음을 나타내고 있다.4) 태인에서 여러 전투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원평 전투에서 패한 전봉준의 동학농민군 주력부대는 넓은 호남평야와 동쪽의 산악지역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태인 지역에서 전봉준(全琫準), 김문행(金文行)․유공만(劉孔萬)․문행민(文行敏) 등 네 명의 접주와 함께 8,000여 명의 농민군으로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태인 전투야말로 최후의 운명이 걸린 싸움이었다. 11월 27일(양력 12월 23일) 오전 10시부터 약 12시간에 걸쳐 전봉준(동학농민군)은 성황산(城隍山)․항가산(恒伽山)․도이산(道伊山 또는 道理山) 등 3개 산 9개 봉우리에 진(陣)을 치고 있었다. 비록 세 곳이라고 하지만 봉우리는 아홉 봉우리가 되며 깃발을 세우고 진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아침 10시경 장위영 대관 윤희영(尹喜永)․이규식(李圭植), 교장 오순영(吳順永)․장세복(張世福)․양기영(梁基英)․이경진(李景振)․홍선경(洪善敬)으로 구성된 관군(경군: 京軍)5) 병정 230명과 일본군 스즈키(鈴木) 소위가 지휘하는 서로 분진대(西路 分進隊) 지대(支隊) 40명6)이 동․서로 나누어 육박하는 이들을 맞았다. 동학농민군은 관군(官軍)이 도착한 것을 알고는 천보총(千步銃)을 한꺼번에 쏘아대니 총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탄환이 빗발쳤으며 계속해서 깃발을 휘두르고 나팔을 크게 불어 그 기세가 호대(浩大)7)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진을 치고 모여 있는 곳은 모두 높은 산과 험한 곳이고 그 이외는 모두 넓은 들이었다. 경군과 일본군은 지금까지 큰 전투에서 효과가 있었던 방식으로 공격하였다. 일본군 40명을 절반으로 나누고 경군도 90명과 140명으로 나누어 일본군을 각각 뒤따르게 하여 협공한 것이다. 관군 병정 90명은 일본 병사 20명과 함께 동학농민군이 있는 산 서쪽 길에서부터 공격하고, 관군 140명은 일본 병사 20명과 함께 동쪽 길을 따라 호응하였다. 동학농민군을 공격하기 위한 분담이 정해지자 두 길에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몰려나와 산으로 올라가니, 탄환이 끊임없이 아래로 쏟아졌고 밭이랑에 의지하여 몰아서 한꺼번에 총을 쏘기고 하고 혹은 들판에 엎드려 쏘기도 하였다. 관군은 대열(隊列)의 선두와 후미가 서로 호응하여 길게 몰아서 달려 나갔다. 그러자 동학농민군은 황겁(惶怯)하여 대열 앞뒤가 뒤섞여 후퇴하며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진을 쳤던 산을 탈환하고서 멀리 건너편을 바라보니 앞뒤의 산에 있던 성황산에서 합하고는 회룡총을 연속 쏴대며 크게 나팔을 부니 탄환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그래서 즉시 산에서 내려와 군사를 모으고 각각의 산으로 올랐던 병사를 집합시켜 다시 네 갈래 길로 나누어 산으로 돌격하였고 한꺼번에 총을 쏘며 공격하니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산 위를 선점했어도 일본군과 경군이 정면으로 치고 올라오자 이를 막아낼 수 없었다. 성황산이 공격군에 의해 점거된 뒤 한가산과 도리산도 각각 2대로 나눈 공격군에 협공을 당하게 되었다. 전투는 새벽부터 저녁 8시까지 하루 종일 벌어졌다. 마지막으로 동학농민군은 많은 희생자와 포로를 남기었다. 태인 전투상황을 대관(隊官) 윤희영(尹喜永)의 보고에 의하면 ‘윤희영(尹喜永)은 관군 90명, 일본군 20명을 이끌고 서쪽에서, 대관 이규식(李圭植)은 관군 140명과 일본군 20명을 이끌고 동쪽에서 진격해 나갔다. 함성을 지르며 천보총(千步銃)을 쏘아대는데 탄환이 비오는듯하여 밭두렁에 의지하고 혹은 논두렁에 의지하며 공격해가니 적들이(동학농민군) 후퇴하여 건너편 성황산으로 집결하였다. 성황산의 적들은(동학농민군) 큰 나팔을 불며 회룡총(回龍銃)을 쏘아 탄환이 비오는듯하였다. 그리하여 관군은 한가산과 도이산에서 하산하여 다시 네 갈래로 나누어 성황산을 돌격해 올라오니 포성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때 적들(동학농민군)은 당해내지 못할 것을 알고 동서로 도망하여 관군은 이를 20리 지경까지 추격하여 40여 명을 사살하고 50여명을 생포하였는데 포로의 말에 의하면 전봉준, 김문행(金文行)․유공만(劉孔萬)․문행민(文行敏)이었다. 또 회룡총 15, 조총 200여 자루와 말 6필 이밖에 많은 탄약과 (죽창)을 노획하고 태인으로 돌아오니 오후 8시가 넘었다.’ 이때 동학농민군은 막아내지 못하고 당해내지 못할 것을 알고는 사방으로 흩어져 각자 고부와 남원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네 길목에 있던 병사들은 동서로 20리가 되는 경계까지 그들을 뒤쫓아 각기 생포한 자가 4~50여 명이고, 탄환을 맞아 죽은 자가 3~40여 명이었으며 태인읍(泰仁邑)은 700~800호가 전소(全燒)되었다. 노획한 군물(軍物) 가운데 회룡총 15자루, 조총(鳥銃) 200여 자루, 탄약과 죽창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고 안장을 앉힌 말이 6필이었다. 어느새 시간이 술시(戌時)가 다 갔는지라 즉시 태인읍에서 군대를 모아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 가며 군사의 수효(數爻)를 계산하니 관군과 일본 병사 모두 무사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휴식하였다.” 라고 하였다.8) 다음은 장위영 병대가 올린 전투보고서를 줄인 것이다.9) 26일 본 진영의 좌부영관 이두황의 명령으로 … 전라 감영을 출발하여 금구읍의 숙소에 도착하였습니다. 이튿날 새벽에 행군하여 태인 경계에 도착하니 이때는 사시였습니다. 적의 형세를 살피니 수괴(首魁) 全琫準․金文行․劉孔萬․文行敏 등 4명이 8,000여 명을 이끌고 태인읍 주산인 城隍山과 閒加山, 道理山에 둔취하였습니다. … 적들은 경군 도착을 알고 천보총을 한꺼번에 발사하여 … 그 기세가 대단했습니다. 적이 있는 곳은 모두 높은 산 요해처이고 그 밖에는 모두 평평하고 넓은 들판이었습니다. 우리 군사는 230명이고 일본병사는 40명이었는데, 대관 윤희영, 교장 이경진․홍선경이 거느린 병사 90명과 일본병사 20명은 적이 있는 산 서쪽 길로 공격하였고, 대관 이규식, 교장 오순영․장세복․양기영이 거느린 병사 140명은 일본병사 20명고 함께 동쪽 길을 따라 대응하여 공격하기로 정한 다음 …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산을 올라 급히 공격하자, 적도는 머리와 꼬리 구분 없이 비로소 물러나 흩어졌습니다. 적들이 진을 쳤던 산을 빼앗고 건너편을 보니 전후 산의 적들이 성황산(적)과 합해서 계속 회룡총을 발사하고 나팔을 크게 부니 탄환이 비오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 군사를 집합시켜 다시 네 갈래로 길을 나누어 급히 산에 오르면서 한꺼번에 총을 쏘며 계속 공격하니 … 적들은 … 사방으로 흩어져 각자 도주하였습니다. 우리 군대는 네 길로 나누어 동서로 20리 까지 쫒아가니 마침내 생포한 자가 50여 명이고, 총에 맞아 죽은 자가 40여 명이었습니다.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총서(叢書)』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10) 윤희영 등이 새벽에 행군하여 사시에 태인(泰仁)의 경계에 이르렀다. 동학농민군의 정형을 정탐하니 동학농민군의 거괴 전봉준(全琫準)·김문행(金文行)·유공만(劉孔萬)·문행민(文行敏) 등 네 명의 접주가 8,000여 명을 이끌고 태인읍의 주산인 성황산(城隍山)·한가산(閒加山)·도리산(道理山, 또는 道伊山)에 모여 진을 치고 있어서 동학농민군과 싸웠다. 대관 윤희영(尹喜永), 교장 이경진(李景振)·홍선경(洪善敬)이 거느린 병정 90명은 일본 병사 20명과 함께 동학농민군이 있는 산 서쪽 길에서부터 공격하고, 대관 이규식(李圭植), 교장 오순영(吳順永)·장세복(張世福)·양기영(梁基英)이 거느린 병정 140명은 일본 병사 20명과 함께 동쪽 길을 따라 호응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진을 쳤던 산을 탈환하였다. 네 길목에 있던 병사들이 동학농민군을 쫓아갔다. 동학농민군 50여 명을 생포하고 총으로 40여 명을 죽였다. 많은 군물(軍物)을 노획하였다. 저녁에 태인읍에서 군대를 주둔하였다. 일본군은 태인 전투 당시에 동학농민군이 수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기도 했다.11) 관군 측에서는 8,000명 혹은 6,000명으로 추산하였다.12) 태인수성군(泰仁守城軍)이 전라감영(全羅監營)에 보내는 보고에 의하면 12월 18일 동구천(洞口川: 동구내) 접주 강찬중(姜贊中)이하 박성실(朴成實), 이명서(李明西), 김자익(金子益), 양정록(梁正祿), 이삼만(李三萬), 전복동(田卜同) 등을 체포했는데 그 중 박성실은 대접주 유공만(劉孔萬)의 부하로 있으면서 함부로 인명을 상하였기 때문에 피해 가족들로부터 타살 당했고 흥천면 강삼리(興天面 江三里), 문선명(文鮮明)을 체포할 때 난타로 치사했고 또 옹지면 춘삼리(瓮池面 春三里: 現 瓮東面) 오성삼(吳成三)을 체포해서 모두 7명을 전주순무영(全州巡撫營)으로 송치했다고 하였다. 태인 동헌은 동학농민군이 점령했던 곳이다.13) 전봉준의 동학농민군 주력이 태인 동헌 뒷산인 성황산 전투에서 패한 후 동학농민군을 다시 결집하였으나, 이미 더 이상 전투에 임할 대오조차 갖출 수 없었다. 전봉준은 음력 11월 28일 금구에서 동학농민군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14) 동학농민군의 실패는 이후 전라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관군․민보군의 잔혹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특히 주력부대인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이 해산한 뒤에도 강진․해남․광양․순천 등지에서는 여전히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의 섬멸작전에 의해 점차 혁명의 열기는 식어갔다. 전봉준은 군대를 해산한 뒤, 3명의 측근을 거느리고 입암산성의 별장 이종록의 협조를 얻어 하루를 유숙하고 다음날 장성 백양사를 거쳐 순창(淳昌) 피노리(避老里)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음력 12월 초2일(양력 12월 28일) 배신자의 밀고로 그 마을 사인(士人)들의 민보군(民堡軍) 일당에게 기습당하여 체포된 뒤 교도대와 일본군에게 인도되어, 나주․전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14) 김개남은 태인에서 잡혀 전주로 압송, 전라감사 이도재에 의해 당시 형장이었던 초록바위에서 처형되었고, 손화중은 고창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은 5차례의 심문을 받은 뒤, 손화중․최경선과 함께 1895년 3월 2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정부(政府)에서는 1895년 1월 16일 각 군현에 열거인물들을 체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때 태인지역은 유공만(柳孔萬: 邑前東九川), 정성도(鄭聖道: 仁谷面殘山), 이봉춘(李奉春: 丁可里), 강변어사(姜便御使: 山外面東谷), 박장근(朴長根: 西面東靈村), (朴大三: 강산리)이었다.16) 나. 동학농민혁명에서 태인의 피해 상황 기록 조선시대 태인현의 진산이자 주산인 서낭산이 있다. 서낭산은 예전에는 성황산(城隍山), 죽사산(竹寺山)으로 불리었으며, 과거 고을의 수호신을 모시던 성황사가 있었다 한다. 동학농민혁명 전투 당시 농민군이 최후 결전을 벌였던 전적지이기도 한데 그때 성황사가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17) 11월 30일 기록 “… 길을 떠나 17리쯤에 태인의 석현점(石峴店)에 이르렀는데, 수십 채의 민가도 불에 타서 연기가 아직도 나고 있어 매우 비참하였습니다. 장위영 대관 윤희영과 이규식이 소대(小隊)를 인솔하여 원평에서 후원(後援)해 와서 바로 태인읍에 이르러 비류 몇 천 명을 토벌했는데, 쏘아죽인 자가 매우 많았고, 생포한 자와 노획한 것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태인읍에서 묵을 때에 이 점사의 앞길에서 척후(斥候)를 기다려 상세한 소식을 듣고 바로 행진하여 3리쯤의 태인읍에 도착했더니 7~8호가 또 불에 탔는데, 모두 비류가 흩어질 때에 불을 놓았다고 합니다. 몇 백 호의 집과 각 관청의 건물들이 모두 비어 있었습니다. 떠도는 백성 몇 명을 불러다가 온갖 방법으로 타일렀더니 차츰 모여들었는데, 멀리 도망한 자도 있고 위협에 따른 비류도 있어서 끝내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마침 비류가 저장했다가 남은 곡식이 있어 각 진(陳)에 나누어 준 뒤에 거기에 묵었습니다. ….”18) 태인은 희생자가 많았던 것 같다. 태인 수성군(守城軍)의 보고에 의하면 12월 18일 동구천(東九川: 東谷里?) 접주(接主) 강찬중(姜贊中) 이하 박성실(朴成實)․이명서(李明西)․김자익(金子益)․양정록(梁正祿)․이삼만(李三萬)․전점동(田卜同) 등을 체포했는데 그중에서 박성실은 대접주(大接主) 유공만(柳孔萬) 부하로 있으면서 함부로 인명(人名)을 상(傷)하였기 때문에 피해가족들로부터 타살당했고, 강삼리(江三里)의 문선명(文先明)은 체포할 때 난타(亂打)로 치사(致死)했다.19) <표 7-1> 동학혁명 일지 중에서 태인 전투와 관련 부분 1862. 월일 미상 전라도 낙안, 창평, 용담, 남평, 구례, 나주, 장성, 진도, 금산, 태인 등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함. 1894. 3. 11. 동학농민군 부안으로 이동. 동학농민군 약 3,000여 명쯤이 금구로부터 태인을 거쳐 부안으로 가는 것을 태인에서 볼 수 있었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 1, 43쪽) 1894. 3. 24. 동학농민군 군기탈취후 태인, 금구로 향함. 고부의 동학농민군들이 고부군의 군기를 탈취하여 태인과 금구 원평 방면으로 향하였다. 1894. 3. 25. 동학농민군, 원평 백산에서 숙영. 동학농민군 일부는 이날 태인으로 들어가서 점심을 먹고 원평에서 숙영….(「梧下記聞」『叢書』 1, 56쪽 ; 「隨錄」『叢書』 5, 162-163쪽, 「隨錄」『叢書』 5,177-179쪽 ; 『駐韓日本公使館記錄』 1, 58쪽). 1894. 3. 26. 태인으로 이동(황현, 『오하기문(梧下紀聞 )』) 저녁 6시경 고부 백산 예동에 있던 동학농민군은 백산이 있는 태인군 용산면 화호(禾湖) 신덕정리(新德亭里)로 이동하였다(「梧下記聞」『叢書』 1, 56쪽 ; 「隨錄」『叢書』 5, 179-180쪽). 1894. 3. 28. 태인 관아로 들어가 군기를 탈취함 1894. 3. 29. 백산의 동학농민군 태인현으로 서찰 보냄. 동학농민군, 태인읍 진입후 금구 이동. 태인 점령(황현, 『오하기문(梧下紀聞 )』) 백산에 설진해 있던 동학농민군은 태인현으로 서찰 한통을 보내 포수와 창수 각 1백 명을 거느리고 북과 나팔, 징과 바라를 일제히 울리며 기다릴 것을 요구하였으며, 서찰 말미에는 ‘제중의소(濟衆義所)’라고 서명하였다(「梧下記聞」『叢書』 1, 56쪽). 이날 저녁 6-7천 명의 동학농민군이 태인읍으로 들어가 곧장 동헌과 내아(內衙)를 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고, 관정(官庭)에 공형들을 결박하여 둔 채 하루를 머물렀다가 다음 날 금구를 향해 출발하였다(「梧下記聞」『叢書』 1, 58쪽 ; 「隨錄」『叢書』 5, 165, 「隨錄」『叢書』 5,180-182쪽).태인현을 공격한 날짜는 「수록(隨錄)」『叢書』 5, 165쪽에는 3월 28일로, 180쪽과 182쪽에는 3월 29일 밤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3월 29일 오후에 태인현으로 서찰을 보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3월 29일이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1894. 4. 1. 태인의 동학농민군 원평으로 이동. 태인의 동학농민군이 감금되어 있던 죄수들을 방송하는 한편, 공금과 문서들을 몰수하여 오전 10시경에 원평으로 가는 대로로 진격하였다. 이날 정오경 원평에 도착한 동학농민군은 천변(川邊)에 설진하고 숙영하였다(「梧下記聞」『叢書』 1, 58쪽 ;「隨錄」『叢書』 5, 165쪽, 「隨錄」『叢書』 5, 180-182쪽). 1894. 4. 2. 부안현감 이철화(李喆和)의 보고. 부안현감 이철화(李喆和)는 이들이 금산이나 태인 지역의 동학농민군과 “일이이야(一而二也) 합성일단(合成一團) 분작삼대(分作三隊) 상통성기(相通聲氣)”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隨錄」『叢書』 5, 167-168쪽). 전라감영군 백산 출동, 동학농민군 태인 화호와 부안으로 나누어 이동. (『전봉준공초』, 『전라도 고부민요일기』) 이날 감영에서는 김제, 부안, 흥덕, 고창, 정읍, 장성, 태인 등 7개 읍에 동학농민군들이 후퇴할 때 뒤따라가며 섬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梧下記聞」『叢書』 1, 60쪽). 금구 도로변에 설진해 있던 동학농민군은 감영 포군 1만여 명이 동학농민군을 치러온다는 소문을 듣고(「東學關聯判決宣告書」『叢書』 18, 431쪽).오후 4시 금구에서 후퇴, 오후 6시경 태인으로 와서 인곡, 북촌, 용산 등지에서 숙영하였다(「梧下記聞」『叢書』 1, 59쪽 ; 「隨錄」『叢書』 5, 166쪽, 「隨錄」『叢書』 5, 184-185쪽) . 1894. 4. 4. 감영 중군, 태인 금구 등지에서 동학농민군 진압, 태인의 동학농민군, 부안에서 합세. 태인, 김제, 부안, 고부 등 4개 읍으로 통하는 길을 모두 차단하여 동학농민군들의 이동을 막도록 하고, 감영의 중군(中軍)이 병대를 이끌고 태인 지역으로 들어갔다. 정오 무렵 금구 원평에서 113명의 동학농민군이 관군에게 체포되었고, 여산에서도 1명, 전주 부근 마을에서 2명이 체포되었다(「梧下記聞」『叢書』 1, 60쪽 ; 「隨錄」『叢書』 5, 186쪽). 그러나 이 가운데 동학농민군은 수명에 불과하였고, 대부분은 양민이었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 1, 61쪽). 태인의 인곡, 북촌, 용산 지역에서 숙영한 동학농민군 가운데 일부는 태인에 남고 4월 6일 밤 혹은 4월 7일에 낮에도 태인의 인곡, 북촌에 있던 동학농민군이 도교산으로 이동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隨錄」『叢書』 5, 171쪽 ; 「兩湖招討謄錄」『叢書』 6, 9쪽) 이때 일부는 부안으로 가고 일부는 태인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천여명은 4일 12시경에는 부안으로 들어가서 이미 4월 1일 무렵부터 부안에 모여 있던 500여 명의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여황현은 동학농민군이 합세한 곳을 상소산(上蘇山)이라 하였다「梧下記聞」『叢書』 1,60쪽). 부안의 동학농민군은 동헌을 공격하여 현감을 구금하고 공형을 결박한 다음, 군기를 탈취하였다(「隨錄」『叢書』 5, 170쪽, 「隨錄」『叢書』 5, 186쪽; 「東匪討錄」『叢書』 6, 160쪽) . 1894. 4. 6. 부안과 태인으로 후퇴(오지영, 『동학사』). 태인의 동학농민군, 고부에서 합세 황토현 전투 승리. 태인에 남아 있던 동학농민군들도 4월 6일 밤 8시경에는 고부 도교산으로 이동하여 그곳의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였으며, 다음날인 4월 7일 새벽 4시경 황토현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감영군을 크게 격파하였다(「梧下記聞」『叢書』 1, 61-62쪽 ; 「隨錄」『叢書』 5, 171-172쪽, 「隨錄」『叢書』 5, 174쪽 ; 「兩湖招討謄錄」『叢書』 6, 6-7쪽 ; 「東匪討錄」『叢書』 6, 161쪽 ; 『駐韓日本公使館記錄』 1, 59쪽 ). 1894. 4. 9. 무장 점령(『양호초토등록』), 홍계훈 경병 160명, 항병 200명 금구, 태인 파견(『동비토록』)
1894. 4. 10. 홍계훈, 금구.태인.정읍.흥덕에 전령. 홍계훈이 금구·태인·정읍·흥덕에 전령을 보내 앞으로 행군하여 전진할 것이므로 인도, 망을 보는일, 보호하는 일을 폐단 없이 시행하라고 지시하였다(「兩湖招討謄錄」『叢書』 6, 35-36쪽). 1894. 4. 11. 홍계훈, 태인에 감결. 홍계훈이 태인에 감결을 보내, 금구에서 모집해 보낼 100명을 다른 곳에서 모집하기로 하였으며 백성들이 본업에 편히 하도록 하게 하라고 지시하였다(「兩湖招討謄錄」『叢書』 6, 37-38쪽). 관군 원세록 군대, 태인읍 주둔, 김시풍 등 효수. 대관 원세록 군대가 태인읍에 주둔하였다. 각 지방관으로 하여금 동학농민군 중에 통문을 들고 왕래하는 자, 사방에 산재하여 백성을 침탈하는 자를 체포하게 하여 나주목에서는 19명 무장현에서는 9명을 잡았다. 김시풍과 서로 호응함이 가장 심한 자 3명을 효수하였다(「兩湖電記」『叢書』 6, 92-96쪽). 관군 완백에게 한 부대를 파견하여 태인 순찰을 명함. 완백에게 한 부대를 파견하여 태인·정읍 2고을을 순찰하게 명하였다. 아울러 군사를 나누지 말고 고부의 난민을 조심스럽게 다룰 것을 지시하였다(「兩湖電記」『叢書』 6, 92-96쪽). 1894. 4. 12. 관군 태인 주둔 부대에 통지, 수성을 명함. 태인에 주둔한 부대에 계속 통지하여 그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명하였다(「兩湖電記」『叢書』 6, 96-98쪽). 1984. 4. 14. 관군 이두황, 금구․태인․흥덕 등지로 이동. 이두황이 2대의 병력을 거느리고 금구·태인·정읍·고창·흥덕 등지로 갔다(「兩湖電記」『叢書』 6, 99-103쪽). 관군 홍계훈, 금구․태인․흥덕․정읍․고창에 전령. 홍계훈이 금구·태인·흥덕·정읍·고창에 전령을 보내, 관군과 관련된 사항을 문제 없이 거행하고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다(「兩湖招討謄錄」『叢書』 6, 43쪽). 홍계훈, 출진 대관에 전령. 홍계훈이 출진한 대관에 전령하여 군대가 태인의 진중으로 향해야 하고 병사들의 척후에 관한 일을 소홀히 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兩湖招討謄錄」『叢書』 6, 43-44쪽). 1894. 4. 18. 홍계훈, 출전하는 대관에게 전령. 홍계훈이 출전하는 대관에게 전령을 보내, 전주로부터 행군하여 태인현에 도착하여 숙박할 것이니 대관이 거느린 병사들은 먼저 전진하지 말고 천천히 행군하여 다시 알리기를 기다리라고 지시하였다(「兩湖招討謄錄」『叢書』 6, 52쪽). 경군 태인 진출, 전라감사 김문현 파직, 김학진을 전라감사로 임명. (『승정원일기』), (『양호초토등록』) 1894. 4. 25. 정읍, 태인, 원평 진출(『양호초토등록』) 1894. 4. 27. 감사 김문현 도망, 양호초토사 홍계훈 태인 도착. 감사 김문현은 동학농민군이 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아나고 없었으며(『全州府史』 113쪽), 전주성이 함락되는 시각 초토사 홍계훈은 영광에서부터 계속 동학농민군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다가 태인현에 도착하여 있었다(「兩湖招討謄錄」『叢書』 6, 17-18쪽). 홍계훈이 진시 경에 태인현에 도착하고, 저녁에 금구현에 도착하였다(「兩湖招討謄錄」『叢書』 6, 18쪽). 1894. 5. 8. 동학농민군 사방으로 흩어짐. 동학농민군은 사방으로 흩어져 일부는 김제, 부안, 고부, 무장 등지로 향하여 가고 일부는 금구, 태인 등지로 향하여 갔으며, 지녔던 창과 칼 등 병기의 일부는 혹 태인현에 반납하고 일부는 혹 지나는 각 점(店)에 맡겨 두었다(「兩湖招討謄錄」『叢書』 6, 23쪽, 「兩湖招討謄錄」『叢書』 6, 77쪽). 1894. 5. 10. 전봉준 금구․김제를 거쳐 태인으로 이동. 농민군 집강소 통치 실시22) 전봉준이 5월 8일 금구, 9일 김제를 거쳐 태인으로 들어갔다(「全琫準供草」『叢書』 18, 66쪽). 1894. 5. 11. 동학농민군, 김제에 난입. 김제에 난입하여 귀화하지 않고 오히려 행패를 부렸다. 이 가운데 일대는 김제, 부안, 고부 등지로 향하고 일대는 금구, 태인 등지로 향하였으나, 전과 같은 작난은 없고, 또 저들이 소지한 창검 가운데 약간은 태인현에 바치고 약간은 인근 각 점(店)에 맡겨 두었으며 재발할 기미가 없다고 하였다(「兩湖招討謄錄」『叢書』 6, 22-24쪽 ;「時事新報」『叢書』 22, 319-320쪽). 1984. 5. 12. 동학농민군, ‘태인 경내에 둔취’ 소문. 동학농민군이 태인 경내에 둔취하여 화약과 병기를 가지고 읍저에 모여 있다는 소문이 낭자하였다(『兩湖招討謄錄』 『叢書』 6, 77-78쪽). 1984. 5. 13. 고부의 동학농민군 태인, 무장, 굴치로 이동, 초토사, 동학농민군 동향 보고. 동학농민군 천 여명이 고부 난산시(卵山市)에 모여 있다가, 5-60명씩 태인지방으로, 1-2백 명씩 무장 굴치(屈峙)로 갔다(「隨錄」『叢書』 5, 233쪽). 초토사는 동학농민군의 동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각처에 산둔(散屯)하였던 동학농민군들이 모두 태인읍에 집합하여 군기를 전부 관고(官庫)에 반납하고 퇴귀(退歸)를 자원하여, 혹자는 피착(被捉)되고 혹자는 귀가하여 하나같이 모두 해산하고 다시는 둔취(屯聚)할 곳이 없습니다. 이제는 동학농민군들이 전부 평정되었으니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 3, 19쪽). 1984. 5. 14. 전봉준, 태인에서 정읍으로 이동, 초토사가 태인 현감에게 내린 전령, 동학농민군, 전열 정비후 전라좌도로 이동. 전봉준이 태인에 머물고 있었다. 전봉준은 전주를 나와 5월 8, 9일 간 김제를 거쳐 5월 10일경 태인에 도착하였다(「全琫準供草」『叢書』 18, 66쪽). 이어 5월 17일 오전 10시경에는 수백 명의 동학농민군이 태인에서 정읍 북면 한교(漢橋)를 거쳐 연지점(蓮池店)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정읍에서 하루를 잔 다음 5월 18일 오후 2시경 장성 쪽으로 향해 갔다. 이것은 5월 8일 전주화약 이후 태인에 있던 전봉준이 이원회가 서울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다시 한번 폐정개혁요구를 전달하기 위해 정읍으로 이동한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隨錄」『叢書』 5, 234-235쪽; 「兩湖電記」『叢書』 6, 153쪽). 따라서 5월 14일 현재 전봉준은 태인에 머무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토사가 태인 현감에게 내린 전령에 따르면 태인현의 관속배(官屬輩)가 동학농민군을 체포한다고 하면서 귀가하여 본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집에 떼를 지어 들어가 부수거나 가재도구 등을 탈취한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돌아갈 곳이 없게 된 고부, 태인, 김제, 부안, 무장, 장성 등지 동학농민군들은 5-60명 혹은 10여 명, 5-6명씩 무리를 지어 부자집에 들어가 밥을 빌어먹거나, 요호(饒戶)에 들어가 음식을 토색질하여 허기를 채우고 있었다(「兩湖招討謄錄」『叢書』 6, 81쪽 ;「兩湖電記」『叢書』 6, 149-150쪽;『駐韓日本公使館記錄』 1, 94-95쪽). 동학농민군은 태인의 읍저 2리쯤 되는 동구천(洞口川)에 동학농민군 100여 명이 각각 병기를 가지고 모여 있으며, 간간히 방포하거나 요민의 전곡을 토색하고, 혹은 그들이 사는 각리(各里)에서 무리를 지어 있고, 이들은 장차 전라좌도(全羅左道)로 갈 것이라 하였다(「隨錄」『叢書』 5, 233쪽). 1984. 5. 17. 동학농민군, 태인면에 둔취, 부사에게 구휼 강요, 정읍으로 이동 행패. 동학농민군 수백 명이 칼을 차고 총을 쏘고, 말을 타고 깃발을 세우고 태인 고현면(古縣面) 동촌면(東村面), 남촌면(南村面)에 둔취해 있는데 그 기세가 대단하였다(「隨錄」『叢書』 5, 233쪽). 태인의 동학농민군 40여 명이 전주에서 자기 마을로 돌아온 후 부사에게 구휼을 강요하였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 3, 19쪽 ; 『駐韓日本公使館記錄』 4, 197쪽). 오전 10시경 동학농민군 수백 명이 각각 창과 총을 가지고 태인쪽에서 정읍으로 들어와서 북면 한교(北面 漢橋)를 지나며 점막의 노파 양소사(梁召史)를 끌어다 총을 쏴서 살해한 뒤 읍에서 3리쯤 되는 연지(蓮池) 점막에 이르러 도리(都吏) 박민창 집에 들어가 가사를 파괴하는 등 제반 행패가 이루 형언할 수 없다고 하였다(「隨錄」『叢書』 5, 234-235쪽 ; 「兩湖電記」『叢書』 6, 153쪽). 1984. 5. 21. 태인의 동학농민군, 장성으로 이동, 인․금구 등의 아전․관노사령, 동학농민군에게 앙갚음. 태인에 있던 동학농민군이 장성으로 갔는데 수효는 많지 않고 순창에서 순천으로 간 동학농민군도 100명이 안 되는데 조석의 음식을 사서 먹는다는 관군 측의 보고가 있었다. 이들은 귀화할 뜻을 보였는데, 아내와 가정이 있는 자는 모두 이미 귀화하였고 도로에서 방황하는 자는 아내도 없고 가정도 없이 추적하여 체포되는데 겁을 먹었기 때문이라는 순천 부사와 영장의 보고가 있었다(「兩湖電記」『叢書』 6, 148쪽). 태인·금구·정읍·고부의 아전이나 관노 사령들이 동학농민군들에게 앙갚음하기 위해 동학농민군에 가담하였던 사람들의 살림을 몰수하자 돌아가도 의지하여 머물러 살 곳이 없게 된 동학농민군 일부가 혹 5-60명 혹 10명 혹 5-6명씩 모여 부자집에 쳐들어가서 밥을 뺏어 먹는 일이 발생하였다(「兩湖電記」『叢書』 6, 149-150쪽). 1894. 5. 22. 초토사, 동학농민군들의 행패 보고. 22일 초토사의 보고에 따르면 무장에서는 동학농민군들이 무덤을 파고, 사는 집을 헐면서 행패를 부렸으며, 태인의 일부 동학농민군은 태인의 수령이 순위영(巡衛營)의 효유문을 가지고 가서 효유하자 귀가하여 생업에 편히 종사하고 있으나 무기는 반납하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兩湖電記」『叢書』 6, 153-154쪽). 1894. 5. 24. 일본인 정탐원, 동학농민군 동태 보고. 일본인 정탐원의 보고에 따르면 태인군은 평온하고 동학농민군이 지나갈 때 이렇다 할 피해가 없었다고 하였다. 장성과 고부에서는 수백 명이 둔취하여 강도질을 한다고 하였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 1, 112쪽). 1894. 5. 26. 일본 정탐원, 동학농민군 동태 보고 5월 22일 전주에 도착하여 5월 26일까지 태인, 고부, 부안, 김제, 금구 등지 동학농민군의 동태를 정탐한 일본인 경부(警部) 오기하라(荻原秀次郞)가 “동학의 잔당이 각지에 출몰한다는 풍설이 있을 뿐이다. 상찰하건대 처음 동학농민군에 가담한 사람 가운데 정상적인 직업을 갖지 않은 무리들이 패주 후에도 따로 생계의 방도가 없으므로 계속 각처에서 도적질이나 기타 부정한 행위를 하고 동학농민군이라 자칭하면서 여행자나 양민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라 생각되지만, 동학농민군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하였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 1, 112-113쪽). 1894. 6. 8. 전봉준, 옥과로 향함. 전봉준은 천우협 관계자들에게 동학농민군 당부(黨符) 14개, 동학 식문(式文)과 약간의 돈, 의류와 짚신을 주고 옥과로 향하였다(강창일, 앞의 책, 2002, 79쪽).「영상일기(嶺上日記)」에는 일단의 동학농민군이 태인에서 순창으로 왔다가 하루를 머문 뒤 옥과, 담양, 창평, 동복, 낙안, 순천, 보성을 거쳐 낙안으로 갔다고 기록하였다(『叢書』 2, 285쪽). 1894. 6. 25. 김개남, 남원에 입성. 김개남이 남원에 입성하여 민간에서 말과 총 등을 찾아 빼앗았다. 이들은 남원에 들어오기에 앞서 태인을 출발하여 순창·옥과·담양·창평·동복·낙안·순천·보성·곡성을 거쳐 왔다(「嶺上日記」『叢書』 2, 285쪽). 1894. 9. 2. 대원군측 밀사, 전봉준과 만남. 전봉준이 제2차 기포를 결심하기 직전인 9월 2일 대원군측 밀사인 박동진(朴東鎭)과 정인덕(鄭寅德) 등이 전주로 내려왔다. 이때 전봉준은 태인 집에서 치병(治病) 중이었고 아직 재기포 할 생각이 없었다(「隨錄」『叢書』 5, 296쪽 ;「全琫準供草」『叢書』 18, 40-41쪽, 「全琫準供草」『叢書』 18, 56-58쪽;『駐韓日本公使館記錄』 8, 55쪽, 361쪽). 1894. 9. 10. 전봉준,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 기병 준비 착수, 각지의 관아에 재기병 통문발송. 재기포를 결심한 전봉준이 태인을 출발, 원평을 거쳐 9월 10일경 삼례에 도착하여 이곳에 대도소(大都所)를 설치하고 기병준비에 착수하였다.(「全琫準供草」『叢書』 18, 23쪽, 「全琫準供草」『叢書』 18, 69쪽, 「全琫準供草」『叢書』 18, 71쪽; 「東學關聯判決宣告書」『叢書』 18, 434-435쪽;『駐韓日本公使館記錄』 1, 129-130쪽 ; 『駐韓日本公使館記錄』 8, 51쪽). 전봉준은 각지의 관아에도 재기병을 알리는 통문을 보내 군수품 조달에 협조할 것을 촉구하였다. 9월 10일 태인현에는 거사를 위해 공곡(公穀)과 공전을 이용해야 하므로 군수미(軍需米) 300석과 동전 2천 냥을 금구, 원평의 도회소로 수송하기 바란다는 전봉준의 통보가 전달되었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 1, 130쪽 ; 『駐韓日本公使館記錄』 8, 5쪽). 1894. 11. 17. 공주에서 후퇴한 전봉준 부대와 청주에서 후퇴한 김개남 부대가 강경에서 만나 전투를 벌였 으나 패배하고 흩어짐. 전라도 나주.영광.금구.태인.광주.황해도 해주 등지에서 전투를 벌임 1894. 11. 23. 전주의 동학농민군, 금구 원평으로 후퇴 전주에 있던 동학농민군이 전주에서 금구 원평으로 후퇴하였다(「巡撫先鋒陣謄錄」『叢書』 14, 44-45쪽; 「巡撫使呈報牒」『叢書』 16, 346쪽 ;『各司謄錄』 63, 「札移電存案」 288쪽).전주에서 후퇴할 때 동학농민군은 두 개의 부대로 나누어 전봉준은 고부 태인 방향으로, 김개남은 남원방향으로 간 것 같으며, 전봉준이 이끄는 부대는 적어도 6-7,000명 정도는 되었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 6, 45쪽). 관군 측에서는 23일 금구원평으로 간 동학농민군이 수 삼천(數三千)명, 25일 원평에 집결해 있는 동학농민군의 수가 1만여 명 이상인 것으로 보고하였다(「巡撫先鋒陣謄錄」『叢書』 14, 44-45쪽; 「先鋒陣呈報牒」『叢書』 16, 209-210쪽). 1894. 11. 25. 원평 구미란 전투. 전봉준 동학농민군 태인으로 후퇴(『순무선봉진등록』) 서로군[森尾부대, 2중대]이 태인전투에서 전봉준부대를 격퇴시킨 후에 태인·흥덕·영광으로 진군하였다. 1894. 11. 27. 전봉준의 동학농민군, 태인에서 관군과의 최후의 전투, 관군․일본 연합군과 전투 대패20), 전봉준, 태인전투에서 대패 후 동학농민군 주력부대 해산 (『양호선봉일기』, 『순무선봉진등록』) 관군 윤희영 등 태인읍의 주산에서 동학농민군과 전투. 농민군, 태인에서 최후 항전. 원평에서 물러나 태인으로 간 동학농민군 8천여 명은 전봉준, 김문행(金文行), 유공만(劉孔萬), 문행민(文行敏) 등의 지휘 하에 태인의 주산인 성황산, 한가산, 도리산 등 3개 산 9개 봉우리에 진을 쳤다. 태인까지 추격해온 관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오전 10시부터 약 12시간에 걸쳐 동학농민군은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4-50명이 생포되고 3-40명이 전사하였으며, 회룡포 15정, 조총 200여 정과 다수의 탄약, 죽창, 말 6필 등이 노획되는 참패를 당하고 고부와 남원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이때 동학농민군의 수는 8,000여 명이었으며, 경군은 230명, 일본군은 40명이었다(「巡撫先鋒陣謄錄」『叢書』 14, 87-90쪽; 「兩湖右先鋒日記」『叢書』 15, 159-162쪽). 일본군은 태인전투 당시에 동학농민군이 수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기도 했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 6, 44-45쪽). 관군 측에서는 8,000명, 혹은 6,000으로 추산하였다(「巡撫先鋒陣謄錄」『叢書』 14, 87쪽; 「兩湖右先鋒日記」『叢書』 15, 161쪽). 전봉준은 태인 전투에서 패한 후 동학농민군을 다시 결집하였으나, 이미 더 이상 전투에 임할 대오조차 갖출 수 없었다. 전봉준은 여기서 동학농민군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全琫準供草」『叢書』 18, 21쪽). 윤희영 등이 새벽에 행군하여 사시에 태인(泰仁)의 경계에 이르렀다. 동학농민군의 정형을 정탐하니 동학농민군의 거괴 전봉준(全琫準)·김문행(金文行)·유공만(劉孔萬)·문행민(文行敏) 등 네 명의 접주가 8,000여 명을 이끌고 태인읍의 주산인 성황산(城隍山)·한가산(閒加山)·도리산(道理山, 또는 道伊山)에 모여 진을 치고 있어서 동학농민군과 싸웠다. 대관 윤희영(尹喜永), 교장 이경진(李景振)·홍선경(洪善敬)이 거느린 병정 90명은 일본 병사 20명과 함께 동학농민군이 있는 산 서쪽 길에서부터 공격하고, 대관 이규식(李圭植), 교장 오순영(吳順永)·장세복(張世福)·양기영(梁基英)이 거느린 병정 140명은 일본 병사 20명과 함께 동쪽 길을 따라 호응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진을 쳤던 산을 탈환하였다. 네 길목에 있던 병사들이 동학농민군을 쫓아갔다. 동학농민군 50여 명을 생포하고 총으로 40여 명을 죽였다. 많은 군물(軍物)을 노획하였다. 저녁에 태인읍에서 군대를 주둔하였다(「巡撫使呈報牒」『叢書』 16, 350-351쪽). 1894. 11. 28. 손병희, 태인으로 후퇴 임실 갈담으로 이동, 관군 이규태, 태인의 석현점 도착. 장위영대관 윤희영 등 태인읍에서 동학농민군 토벌. 원평에서 일본군과 경군의 공격을 받고 전봉준과 같이 싸우던 손병희는 태인으로 후퇴, 전봉준과 헤어진 다음 내장산 갈재를 넘어 순창 복흥을 거쳐 28일에 임실 갈담으로 왔다. 청운면 새목터 허선(許善)의 집에 있던 최시형과 함께 장수, 무주를 거쳐 북상하였다(표영삼, 「남원지역 동학농민혁명운동」『동학연구』 5, 1999). 이규태가 금구현(金溝縣)에서 점심을 먹고, 원평(院坪) 거리(巨里)에 도착하였다. 행군하여 태인(泰仁)의 석현점(石峴店)에 도착하였다(「巡撫使呈報牒」『叢書』 16, 348-349쪽). 장위영 대관 윤희영(尹喜永)·이규식(李圭植)이 소대를 이끌고 원평을 지원하기 위하여 내려오다가 태인읍에 도착하여 동학농민군 몇 천 명을 토벌하였다. 많은 동학농민군을 포살하고 생포하였다(「巡撫使呈報牒」『叢書』 16, 348-349쪽). 1894. 12. 1. 손화중부대 해산. 종송리에서 김개남 체포, 김개남 태인에서 체포. (『선무사정보첩』, 『선무선봉진등록』) 심영에서 파견한 병정들이 태인 종송리(種松里)에서 김개남(金介男)을 붙잡았다(「巡撫使呈報牒」『叢書』 16, 352쪽). 김개남이 11월 23일 전주에서 남원 방면으로 퇴각하였다가, 12월 1일 태인 산내면 종송리(山內面 種松里)에서 11월 30일부터 추적해온 강화병 병방 황헌주와 전초대관(前哨隊官) 박승규가 이끄는 관군 80명과 포교 3명에게 체포되었다(「巡撫先鋒陣謄錄」『叢書』 14, 120쪽; 「先鋒陣呈報牒」『叢書』 16, 223쪽 ; 「巡撫使呈報牒」『叢書』 16, 352쪽;『駐韓日本公使館記錄』 1, 197쪽). 1894. 12. 2. 전봉준 순창 피노리에서 체포(『선무선봉진등록』) 윤희영 등이 새벽에 행군하여 사시에 태인(泰仁)의 경계에 이르렀다. 동학농민군의 정형을 정탐하니 동학농민군의 거괴 전봉준(全琫準)·김문행(金文行)·유공만(劉孔萬)·문행민(文行敏) 등 네 명의 접주가 8,000여 명을 이끌고 태인읍의 주산인 성황산(城隍山)·항가산(恒伽山)·도리산(道理山, 또는 道伊山)에 모여 진을 치고 있어서 동학농민군과 싸웠다. 대관 윤희영(尹喜永), 교장 이경진(李景振)·홍선경(洪善敬)이 거느린 병정 90명은 일본 병사 20명과 함께 동학농민군이 있는 산 서쪽 길에서부터 공격하고, 대관 이규식(李圭植), 교장 오순영(吳順永)·장세복(張世福)·양기영(梁基英)이 거느린 병정 140명은 일본 병사 20명과 함께 동쪽 길을 따라 호응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진을 쳤던 산을 탈환하였다. 네 길목에 있던 병사들이 동학농민군을 쫓아갔다. 동학농민군 50여 명을 생포하고 총으로 40여 명을 죽였다. 많은 군물(軍物)을 노획하였다. 저녁에 태인읍에서 군대를 주둔하였다. 참고문헌: 『巡撫使呈報牒』, 『叢書』 16, 350-351. <표 7-2> 손병희의 동학농민혁명 활동 중에서 태인 흔적 원평에서 일본군과 경군의 공격을 받고 전봉준과 같이 싸우던 손병희는 태인으로 후퇴, 전봉준과 헤어진 다음 내장산 갈재를 넘어 순창 복흥을 거쳐 28일에 임실 갈담으로 왔다. 청운면 새목터 허선(許善)의 집에 있던 최시형과 함께 장수, 무주를 거쳐 북상하였다(표영삼). 자료 : 표영삼, 『남원지역 동학농민혁명운동』, 『동학연구』 5, 1999. <표 7-3> 1894년 11월 27일(음)에 동학농민혁명일지에 기록된 태인에서 관군과의 전투 대패 원평에서 물러나 태인으로 간 동학농민군 8천여 명은 전봉준, 김문행(金文行), 유공만(劉孔萬), 문행민(文行敏) 등의 지휘 하에 태인의 주산인 성황산, 항가산, 도리산 등 3개 산 9개 봉우리에 진을 쳤다. 태인까지 추격해온 관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오전 10시부터 약 12시간에 걸쳐 동학농민군은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4-50명이 생포되고 3-40명이 전사하였으며, 회룡포 15정, 조총 200여 정과 다수의 탄약, 죽창, 말 6필 등이 노획되는 참패를 당하고 고부와 남원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이때 동학농민군의 수는 8,000여 명이었으며, 경군은 230명, 일본군은 40명이었다. 참고문헌: 『巡撫先鋒陣謄錄』, 『叢書』 14, 87-90. ;『兩湖右先鋒日記』, 『叢書』 15, 159-162.
1년간에 걸친 동학혁명은 30~40만의 희생자를 낸 채 끝나고 말았지만, 반봉건·반외세를 표방하며 일어난 역사상 최초의 민족운동이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또한 대내적으로는 갑오개혁을 불러왔으며, 대외적으로는 청·일 양군의 출병을 유발,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혁명군의 하부구조는 상당수가 뒤이어 일어난 의병운동에 참여, 반봉건·반외세 운동을 계속해나갔다.
3.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의 지방 행정 조직과 태인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실패로 끝나 개화 세력은 기세를 펼 수 없었으나 동학혁명의 폭발을 계기로 다시금 내정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1894년의 이른바 갑오개혁 때 지방제도에 대한 개혁 방침이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1895년 5월 26일에 대대적인 지방행정구역의 개혁이 단행되었다. 즉, 조선 초기 이래의 8도제를 폐지하고, 새로이 23부제(府制)를 공포하였다. 이와 함께 종래 부·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 등으로 나누어져 있던 지방행정구역을 총 337개의 군(郡)으로 단일화하고, 이를 23부(府) 아래에 분속시켰다.
이때 태인현은 전주부(全州附)의 20개 군의 하나인 태인군(泰仁郡)으로 승격이 되었다. 태인군에 속하는 면(面)은 18개 면으로 산외이변면, 산외일변면, 산내이변면, 산내일변면, 남촌일변면, 고현내면, 동촌면, 옹지면, 사곡면, 은동면, 감산면, 북촌면, 용산면, 흥천면, 인곡면(仁谷面), 군내면(郡內面), 남촌이변면, 서촌면이었다.
1895년(고종 32년, 칙령 제98호)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로 구분하고, 목․부․군․현(牧府郡縣)의 명칭을 군(郡)으로 통일하여 23府에 각각 예속시켰고 이 때 全州府 泰仁郡이었다.(註: 관명(官名)을 군수(郡守)로 통칭했다.) 1896년(조선 26대 고종 33년 칙령 제36호) 23부제를 폐지하고 13도제를 취하여 전라도를 전라남북도로 분할한 바, 전라북도에는 26군을 두었고, 태인군이 포함됨. 태인군은 전북 26군 중 2등군에 속하고, 정읍군은 4등군에 속함. 참고로 1등군 전주, 남원이고 2등군은 고부, 김제, 태인이었음. 1897년(광무 원년) 정읍현이 정읍군으로 승격됨. |
이와 같은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은 불합리한 점이 많아 다음 해인 1896년 8월 4일에 부제(府制)를 개정하여 수도인 한성부(漢城府)를 제외하고 전국을 13도(道)․1목(牧)․9부(府)․329군(郡)으로 하여 각 부군(府郡)은 5등급으로 차등을 두어 인원․봉급․경비를 달리하였다. 13도제의 개편은 옛날 도제로 복귀하고 부와 목을 다시 두었다는 점에서 23부제와 차이가 있으나, 8도를 13도로 세분해 행정의 능률을 꾀하고 군 단일화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점에서는 갑오개혁기의 개혁방향을 계승하고 있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내용에 있어서도 지방관원의 임용절차와 보수 규정, 면리(面里)의 운영 등에 있어서 23부제에 비해 달라진 것이 많았으나, 관찰사를 내부대신의 감독 아래 두게 하고 지방관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등의 기본정신에는 차이가 없었다. 13도제로 개편된 지방행정은 이후 지방행정관인 관찰사와 군수의 권한의 한계를 명확히 규정하였다. 지방행정은 중앙의 지휘 감독을 받아 현대적 행정체제가 수립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광개혁기(光武改革期)의 13도제는 옛날의 도제(道制)에 토대를 두되 그 운영 내용에 있어서는 봉건적 성격을 탈피하고 근대적 성격의 중앙집권적 지방제도를 확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때 개정된 13도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방행정의 근간이 되었다.
<표 7-4> 2등군(郡) 직원 수 | ||||||||||||
군수 |
세무조사 |
장교 |
이호 |
리 |
통별 |
사령 |
객사직 |
향교직 |
세무서기 |
통인 |
사령 |
계 |
1 |
1 |
6 |
1 |
8 |
1 |
6 |
1 |
1 |
2 |
1 |
3 |
32 |
<표 7-5> 태인현의 면별 인구통계21) 1888년(高宗 25) 기준 | |||||||||||
면명 (面名) |
구분 (區分) |
인구수 (人口數) |
면명 (面名) |
구분 (區分) |
인구수 (人口數) |
면명 (面名) |
구분 (區分) |
인구수 (人口數) |
면명 (面名) |
구분 (區分) |
인구수 (人口數) |
옹지면 (瓮池面) |
호구(戶口) |
451 |
고현내면 (古縣內面) |
호구(戶口) |
416 |
흥천면 (興川面) |
호구(戶口) |
355 |
서촌고 용구산면 (龍口山面) |
호구(戶口) |
314 |
남(男) |
849 |
남(男) |
680 |
남(男) |
708 |
남(男) |
627 | ||||
여(女) |
1.042 |
여(女) |
1,107 |
여(女) |
782 |
여(女) |
813 | ||||
계(計) |
1,891 |
계(計) |
1,967 |
계(計) |
1,490 |
계(計) |
1,440 | ||||
동촌면 (東村面) |
호구(戶口) |
505 |
거산면 (居山面) |
호구(戶口) |
259 |
용구산면 (龍口山面) |
호구(戶口) |
705 |
용구산면 (龍口山面) |
호구(戶口) |
254 |
남(男) |
1,038 |
남(男) |
512 |
남(男) |
1,084 |
남(男) |
416 | ||||
여(女) |
1,032 |
여(女) |
608 |
여(女) |
1,449 |
여(女) |
638 | ||||
계(計) |
2,070 |
계(計) |
1,120 |
계(計) |
2,497 |
계(計) |
1,054 | ||||
산외면 (山外面) |
호구(戶口) |
513 |
남촌면 (南村面) |
호구(戶口) |
602 |
북촌면 (北村面) |
호구(戶口) |
467 |
감산면 (甘山面) |
호구(戶口) |
666 |
남(男) |
924 |
남(男) |
804 |
남(男) |
760 |
남(男) |
807 | ||||
여(女) |
925 |
여(女) |
1,235 |
여(女) |
1,145 |
여(女) |
1,659 | ||||
계(計) |
1,849 |
계(計) |
2,039 |
계(計) |
1,905 |
계(計) |
2,466 | ||||
산내면 (山內面) |
호구(戶口) |
794 |
서촌면 (西村面) |
호구(戶口) |
412 |
사곡면 (沙谷面) |
호구(戶口) |
425 |
군내면 (郡內面) |
호구(戶口) |
610 |
남(男) |
1,245 |
남(男) |
695 |
남(男) |
756 |
남(男) |
1,237 | ||||
여(女) |
1,376 |
여(女) |
844 |
여(女) |
1,217 |
여(女) |
1,195 | ||||
계(計) |
2,621 |
계(計) |
1,539 |
계(計) |
1,973 |
계(計) |
2,432 |
그리고 군 이하의 면(面)․리(里)는 조선시대의 전통을 토대로 하여 근대적 자치계의 개념을 가미한 향회(鄕會)를 실시하였다.
향회는 1895년 11월 3일 의정부 주본(議政府 奏本)으로 발포된 향회조규(鄕會條規) 및 향약판무규정(鄕約辦務規定)에 의하여 지방 주민이 해당 지방행정 단위의 공공사무 처리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규정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있어서 근대적 의미의 지방자치제 발전의 효시가 되었다. 향회는 마치 지방의회의 기능과 유사한 것으로서 대․중․소회가 있어 대회(大會)는 군회(郡會), 중회(中會)는 소회(小會)는 리회(里會)였다.
그 조직은 군회는 각 면의 집강(執綱) 및 면공선(面公選)의 2인으로 구성하였고, 면회는 집강과 면내 각 리존위(里尊位) 및 리공선(里公選)의 2인으로 하고, 리회는 존위와 리(里) 안에서 매호 1명으로 구성하되 징역 또는 조세처분을 받는 자는 제외였다.
4. 을사의병(乙巳義兵)과 태인군
조선 말기 일본의 침략 과정에서 일어난 의병투쟁은 대체로 세 시기로 나눈다. 제1기 의병은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살해한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 등을 강제 시행한 을미개혁(乙未改革) 이후의 을미의병(乙未義兵)이고, 제2기 의병은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 乙巳勒約)이 강제로 체결됨에 따라 독립국으로서의 자주권을 상실하게 되자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양반유생과 민중이 일으킨 항일 무력투쟁이 일어난 을사의병(乙巳義兵)이며, 제3기는 1907년 정미7조약 및 군대해산에 자극받아 일어난 정미의병(丁未義兵)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위해 무력을 앞세워 을사조약(乙巳條約)(‘을사보호조약’이라는 이름으로 체결하였으나 강제로 체결하였으므로 ‘을사늑약( 乙巳勒約)이라고도 함)을 강제 체결하고(1905. 11. 17.)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그 결과 민족의 저항은 여러 가지 형태의 항일운동으로 나타났다. 고위 관료들은 정부에 조약을 파기할 것을 간청하는 상소를 하였으나, 되돌릴 수 없는 현실에 의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하는 자가 속출하였다. 장지연은 신문 사설을 통해 비분을 전하였고, 시민들은 조약을 체결한 대신들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항일의병이 봉기하였다. 이것이 을사의병이다. 특히 1906년에 의병활동이 활발하여 병오의병(丙午義兵)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을사의병이 가장 먼저 봉기한 지역은 을미의병 때도 가장 활발하였던 원주·제천·단양 등 중부 일대였다.
을사의병 중 제일 규모가 크고 성공적으로 치열한 항전을 벌인 의병진은 민종식(閔宗植)·안병찬(安炳瓚) 등이 주축이 된 홍주성(洪州城)을 점령한 홍주(洪州) 의병이었다. 일본군은 3개 중대와 기병 1개 소대, 기관총 등을 동원하여 3일간의 격전을 벌인 끝에 겨우 의병을 제압할 수 있었다. 홍주성 전투는 비록 실패하였으나 을사의병 가운데 가장 큰 전과를 거두었다.
다른 의병으로 유명한 것은 전 참찬 최익현(崔益鉉) 의병진이다. 그는 대원군 시대부터 유림의 대표로 배일사상이 강한 강직한 관리로 널리 알려졌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을사의병)의 전개를 촉구하였다. 위정척사사상에 따라 국가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직언 상소를 하여왔던 인물이어서, 그의 의병 조직은 전국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1906년 6월 4일에 74세의 고령으로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 강회(講會)에서 태인 군수를 역임했던 임병찬(林炳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였고,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의거했다. 최익현 의병진은 정읍·순창을 지나 담양․곡성을 점령하고 순창으로 회군하여 왜군과 접전하여 격퇴시킨 한편, 순창에 진을 치고 있던 6월 12일, 전주·남원에 주둔한 진위대와 대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하기 위하여 교전을 회피하였는데, 진위대는 오히려 이 틈을 공격하여 최익현 의병진은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 결과 최익현, 임병찬(林炳瓚), 고석진(高石鎭), 김기술(金箕述), 문달환(文達煥), 임현주(林顯周), 유종규(柳鍾奎), 조우식(趙愚植), 조영선(趙泳善), 나기덕(羅基德), 이용선(李容先), 유해용(柳海瑢), 최제학(崔濟學) 등 주모자 13명이 붙잡힘으로써 의병진은 해체되었고, 최익현은 다음 해에 일본 쓰시마(對馬島)로 이송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敵)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유소(遺疏)를 구술(口述)하였고, 이를 임병찬에게 초(抄)하여 임금께 올리게 하였다. 임병찬의 설득으로 단식을 중지하였으나 그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문집에 『면암집(勉菴集)』(합 48권)이 있다. 그리고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대마도에 유배되어 사망할 때까지 기록을 담은 임병찬의 『대마도일기』가 전한다.
임병찬은 1907년 1월 방환되었으나 그해 말 전주주재 일본수비대에 다시 붙잡혀 천안수비대에 갇혀야 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국권을 상실하자 은거하면서 재차 거의를 도모했다. 1912년 고종의 밀조를 받고 독립의군부 전라남도 순무대장에 임명되어, 각지에 격문을 발송하고 의병조직을 확대 강화했다. 그해 12월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육군부장 전남도 순무대장(全南巡撫隊長)에 임명되었다.
1913년 아들 응철(應喆)을 서울로 보내 이인순, 곽한일, 전용규 등과 협의케 하는 한편 유생 임태홍, 임창현, 김덕장 등과 같이 호남지방의 조직정비에 착수했다.
1913년 2월 전라남북도 순무총장 겸 사령장관에 임명된 그는 호남지방의 조직을 완료하고 독립의군부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가 이명상, 이인순 등과 협의하여 독립의군부의 편제를 재정비했다.
그는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총독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제출하여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주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동지 김창식(金昌植)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자백함으로써 독립의군부의 국권회복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많은 간부와 동지들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자 경무총감과 면담, 국권반환 및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했다. 6월 1일 재차 총리대신과 총독에게 편지를 보내 면담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일본에 의해 죽느니 스스로 죽겠다며 3차례에 걸쳐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6월 13일 거문도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독립에의 염원을 안은 채 단식으로 목숨을 거두었다. 저서로 『돈헌문집(遯軒文集)』이 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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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 조선 시대, 지방에 어떤 일이 터졌을 때에 그 일을 조사하려고 보내던 임시 벼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 1894년 12월 06일(음) 전라도관찰사, 金介男을 泰仁에서 생포했음을 보고. 고종시대사 3 (국사편찬위원회, 1967~1972), 692. 「巡撫先鋒陣謄錄」『叢書』 14, 120. 「先鋒陣呈報牒」『叢書』 16, 223. 「巡撫使呈報牒」『叢書』 16, 352.『駐韓日本公使館記錄』 1, 197.
3) 박재상, “동학농민혁명과 정읍”, 『전북의 역사문물전Ⅵ 정읍』 (국립전주박물관, 2006), 246.
4) 문경민, 『동학농민혁명 100년』 (나남신서 389, 1995.04.01.), 347.
5) [역사] 고려와 조선 시대, 수도 지역에 주둔하는 군대의 군사를 이르던 말.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6) 「巡撫先鋒陣謄錄」『叢書』14, 87~90. 「兩湖右先鋒日記」『叢書』15, 11월 25일, 159~162.
7) “…連放千步銃 聲連不絶 丸飛如雨 連續揮旗 大吹喇叺 其勢浩大…”
8) “巡撫使呈報牒”,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 1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7), 380~381.
9) 신영우, “北接農民軍의 公州 牛禁峙·連山·院坪·泰仁戰鬪”, The journal of Korean history no. 154 (韓國史硏究會, 2011), 255~298.
10) 「巡撫使呈報牒」『叢書』 16, 350-351.
11) 『駐韓日本公使館記錄』6, 44~4.
12) 「巡撫先鋒陣謄錄」『叢書』 14, 87. 「兩湖右先鋒日記」『叢書』 15, 161.
「巡撫先鋒陣謄錄」『叢書』 14, 87-90. ; 「兩湖右先鋒日記」『叢書』 15, 159-162. 일본군은 태인전투 당시에 동학농민군이 수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기도 했다
『駐韓日本公使館記錄』 6, 44-45. 관군 측에서는 8,000명, 혹은 6,000으로 추산하였다
「巡撫先鋒陣謄錄」『叢書』 14, 87; 「兩湖右先鋒日記」『叢書』 15, 161.
13) ‘1894년 4월 초 8일 정읍 겸임 태인현에서 보고한 내용에서, “저들 무리가 곧바로 장청에 들어가서 방문을 부수고 갇혀 있는 저들 무리 6명을 풀어 준 후 또 군문을 부수고 많은 양의 기계와 창과 검을 가져갔으며, 동헌 각 곳에 있는 공형과 여러 서리들과 도사령(都使令)의 가산을 모두 부수고, 부상들이 살고 있는 3채로 모두 불살랐으며, 곧바로 저녁밥을 먹고 해시(亥時, 오후 9~11시)에 곧바로 고부 삼거리로 갔다”고 하였습니다.…’(1894년, 영문에서 보낸 기별)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3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0)
14) 「全琫準供草」『叢書』 18, 21. 「全琫準供草」, 初招問目, 「東學亂記錄」하권, 529.
15) 法部, 「全琫準·孫化中·崔景善 押交件」(政府記錄保存所 마이크로필름 문서)
16) 최현식편, 『增補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74. 3.), 149.
17)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東軒』 第5號 (전라북도․ 정읍시, 2012), 70.
18) “先鋒陣上巡撫使書附雜記”,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 1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7), 347.
19) 최현식편, 앞의 책, 153.
20) 정읍문화원, 『井邑東學文化』 1994 第2輯 (1994.10. 1.), 309.
21) 정읍문화원, 앞의 책, 311.
22) 최현식편, 앞의 책,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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