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문화유적(삶의 자취)/태인의 비지정문화재

비지정 누정 문화재 - 읍원정(挹遠亭)

증보 태인지 2018. 5. 25. 14:34

   읍원정(挹遠亭)

 

 

 

 

 

 

 

 

   항가산은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 있는 야트막한 산으로 조선 시대에 사림(士林)의 소유지였으며 풍치가 뛰어났다고 전해지는 항가산(恒伽山) 오르막에는 원두막 같은 대원정(大願亭) 정자가 물길위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자식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한다

   또 그 길로 조금만 가면 중턱에 1855(철종 6, 丙辰) 태인(泰仁) 현감(縣監) 이승경(李承敬)이 시주(詩酒)로 음풍영월(吟風詠月)하며 선비들에게 문학(文學)을 권장하기 위해 유림 49인과 함께 시사(詩社, 詩稧; 시를 짓고 즐기기 위하여 만든 모임)를 만들며 태인면 태성리 152번지-2에 세운 건물이다. 이 정자를 읍원정(揖遠亭)이라 부르고, 이는 遠呑山光(원탄산광) 平挹江瀨(평읍강뢰)라는 의미이다.(멀리는 산 빛을 삼키고 있는 듯하고, 평평한 강 물결은 손으로 퍼낼 수 있을 듯이 보이는데...)1)

   일시(一時) 번화(繁華)를 자랑하는 이 정자도 풍마우습(風磨雨濕) 수 십 년에 동서로 퇴폐(頽廢)하여 황량(荒凉)한 옛터에 추초(秋草)만 만정(滿庭)하더니, 1920년 이 지역의 자선 사업가였던 양재(陽齎) 김재일(金在一)이 감회(感懷)한바있어 사원(社員)의 자손 65명과 다시 시사(詩社, 시인(詩人)들이 조직(組織)한 문학적(文學的) 단체(團體))를 단결하는 동시에 혼자의 힘으로 중건(重建)하였고, 송석(松石) 김용곤(金湧坤)이 토지 약 1,160(350)을 희사하였다.2) 그 후 회원들이 추렴하여 사들인 논 약 3,960(1,200)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읍원정(揖遠亭)이 유지되었다 한다.

   읍원정은 정면 4.5·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 건물 동쪽에 시사 회원들의 이름이 새겨진 시사제명비(詩社題名碑)와 시사중결비(詩社重結碑), 현감이후승경화정선비(縣監李侯承敬和淸 善碑), 읍원정중수기념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20년경 태인면 태성리에 태인 객사(客舍)가 헐릴 때 나온 객사 기둥과 대들보를 매수하여 나온 재목으로 다시 지은 건물이다.3)

 

   정()의 남쪽에 연애(緣崖)를 착(, 뚫다, 차다, 새기다)하야 산경(山逕, 산의 좁은 길) ()하였으니 그 주위(周圍)에는 연죽창송(緣竹蒼松, 푸른 대나무와 소나무)이 우거져있다. 동북(東北)이 막힌 일궁동천(一弓洞天)에 서남(西南)이 벽개(闢開)하야 멀리 海郡三山(瀛州, 蓬萊, 方丈)이 안전(眼前)에 공집(拱揖)하며 이 산()에 원()을 시()한 연류(練流)의 수계(水溪)는 환사(綄紗)를 걸침과 흡사(恰似)하니 차정(此亭)에 등()하면 소위진세(所謂塵世)를 떠나 우화등선(羽化登仙)의 감()이 생()하며 청량(淸涼)한 공기(空氣)를 흡수(吸收)할 수 있다.(見古蹟)4)

   읍원정 시사(詩社)는 지금의 계()와 비슷한 조직이었으나 관()에서 조직했다는 점에서 성격이 다르다. 시사(詩社)에 가입한 이들은 수시로 이곳에 모여 음풍농월(吟風弄月)하고, 친목(親睦)을 도모하였다 한다.

   피향정과 읍원정이 태인지역의 시사(詩社)의 역활을 해왔다.

   이른 봄 읍원정 입구에 노랗게 산수유 꽃이 피어 있었지만 아무도 없는 적막감만 나그네를 맞이하고 있다.

   태인에는 노휴재(老休齋)가 있는데 덕망있는 사람은 거의가 본재(本齋)를 거쳐 갔다 한다.

   노휴제(老休)의 재원(齋員)은 부속시설(附屬施設)인 읍원정(揖遠亭, 詩亭) 회원 가운데 만 65세 이상인 사람이면 자동적(自動的)으로 영입(迎入)하게 된다.

   정내에 넓은 대청마루에는 많은 편액과 주련들이 빽빽이 걸려있다.

 

 

 

 

   특히 정 안에는 49명의 계원들 편액이 있는데, 다양한 서체와 모양들은 좋은 감상거리가 되고 있다.

   김진민의 스승이며 대한제국의 관료 겸 일제 강점기의 서예가로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 1936)는 가끔 태인에 내려와서 이 고장의 문인묵객들과 교유하였고, 읍원정에도 그의 글씨를 남겼으니 호상소유(湖上小游)편액이다.

 

   시사제명비(詩社題名碑)에 기록된 인원은 다음과 같다. 사장(社長) 이승경(李承敬, 縣監) 49명이다.

 

 

 

 

시사제명비(詩社題名碑)

 

을묘년에 시사를 이루고 사원들이 비석에 성명을 새겨 세웠다. 내가 웃으며 비석을 어찌 믿으리오. 지남에 있는 두 개의 비석 중에서 하나의 비석은 육지에 있었고 또 한 비는 물속에 있어서 결국은 다 마멸하고 말아 사람들이 조롱하니 난정계와 서원의 모임이 어찌 비석만 세워 전할 것인가. 그대들은 이태백과 두자미를 이러 밝고 진소유와 황정연을 엿보면 이 시사의 성명이 장차 오래 갈 수 있을 것으로 여길 것이다. 풍우에 마멸되고 이끼가 끼여 백년이 지나면 글씨가 흐려질 것이니 그것으로 오래 갈 것을 믿을 것인가. 계전을 모으면 계명부에 성과 이름이 분명히 적혀 질 것이나 비석에 새긴 이름만은 못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나의 말에 따라 그 이름을 비석에 넣었다.

 

태화자 찬

상지 6년 병진 7월 일

 

 

사장(社長) 이승경(李承敬, 縣監)

이규헌(李圭憲), 송석조(宋錫祖), 이인재(李麟在), 이진두(李鎭斗), 최종한(崔宗漢), 이수범(李秀範), 홍영섭(洪永燮), 김지희(金之熙), 백학수(白鶴洙), 김상홍(金相洪), 송자일(宋字一), 서상선(徐相選), 이정룡(李廷龍), 이돈식(李敦植), 이병인(李秉寅), 민치두(閔致斗), 이병돈(李秉燉), 서면순(徐勉淳), 시인구(柴仁耉), 김복수(金馥秀), 시창운(柴昌運), 김응석(金膺錫), 송남모(宋南模), 송우량(宋祐良), 송윤희(宋潤喜), 서용헌(徐瑢憲), 송희중(宋喜中), 김재흠(金在欽), 김일연(金一淵), 시성권(柴聖權), 최주한(崔周漢), 송상표(宋相杓), 손기인(孫祺仁), 송여일(宋如一), 송성서(宋聖瑞), 송달석(宋達錫), 박성연(朴性衍), 유장수(柳長秀), 송용학(宋龍學), 송민구(宋民龜), 오상학(吳庠學), 전준권(田畯權), 최동현(崔東賢), 김상의(金商義), 시달권(柴達權), 송석영(宋錫英), 송현구(宋玄龜), 이원모(李元模), 서영현(徐永憲)5)

 

 

 

 

   시사중결비문(邑遠亭)

 

   태화자가 말하기를 비석을 어찌 믿으라 하였으니, 여러분은 이태백과 두자미6)를 본받고 진소유와 황정견7)을 따르면 이 모임에 길게 유지될 것이다. 을묘년부터 금년까지 75년간 모임의 법규는 있지만 한 번의 모임을 갖지 아니하고 비석만 홀로서 있으니 뭐 흥이 나겠는가. 고을 사람들이 그전 사원(社員)들과 회의를 갖고 비와 정자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이 정자는 김재일씨가 독담하여 새롭게 하고 비는 이끼가 끼여 글자가 보이지 않아서 다시 새기었다. 한유가 말하기를 한번 용문에 오르면 그 이름이 열 배라 하였는데 생각하면 시사의 중함이 용문에 뒤지지 아니하니 우리들은 한번 뛰어 효과가 열배 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인가. 지금 여러 사람이 늦게라도 깨닫지 못하였더라면 이루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빨리 비를 새로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비를 세우는 데 공로가 있는 사람을 계에 올리고 비에 이름을 새겨 주면서 이 비가 영구히 유지되기를 도모하면 우리 일이 잘 될 것이라는 회의에 다 찬동하고 돌을 쪼고 갈며 이름을 새기니 먼저의 비보다 더욱 빛이 났다. 사람은 돌이 필요하고 돌은 사람을 기다림으로 사람과 돌은 서로 빠뜨릴 수 없다. 열 사람은 힘을 쓸 지어다. 공자가 말하기를 비석을 세웠으면 훼손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성인이 어찌 우리를 속일 수 있을 것인가 이에 기문한다.

 

도유대황낙 늦은 봄 하순

우당 서 택 환 찬

 

치석 김 경 용 근서

집터 349평 김 용 곤 의연

1227평 김 재 일 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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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張奉善,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36. 11. 20.), 21.

2) 앞의 책.

3) 객사(客舍): 태인면 태성리에 있으니 50년전(1936년 기준)에 이를 훼철(毀撤)함에 김재일(金在一)씨가 객사(客舍) 기둥과 대들보(柱梁)를 매수(買受)하여 읍원정(挹遠亭)을 중건하였다. 張奉善,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36. 11. 20.), 44.(관아의 객사 참조)

4) 앞의 책, 21.

5) 내 고장 傳統文化(정읍군청 공보실, 1983. 11. 9.), 257.

6) 이백(李白, 701~ 762)은 중국의 시인이다.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촉나라의 영토였던 쓰촨 성 쑤이예에서 태어났다. 두보와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힌다. 이 두 사람을 합쳐서 "이두(李杜)"라고 칭하고 이백을 "시선(詩仙)"이라 부른다. 현재 약 1,100여 수의 시들이 남아 있다.

   두보(杜甫, 712~ 770)는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이다.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 중국 고대 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시성(詩聖)이라 부르며, 그의 작품은 시사(詩史)라 부른다. 이백과 함께 이두(李杜)라고도 일컬으며, 그 당시 정의가 없는 경제 구조로 고통 받는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시로 묘사한 민중시인이다.

7)) 진관은 북송 때 장쑤성 가오유(高郵) 사람으로 자는 소유(少遊), 태허(太虛)이고, 호는 한구거사(邗溝居士), 회해선생(淮海先生)이다. 진관은 고문과 사에 능했는데, 특히 남녀 애정과 애달픈 신세를 한탄하는 서정적인 내용의 묘사에 뛰어나서 완약파4) 사인(詞人)의 대표적인 작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송사에는 진관이 문장이 화려하면서도 세심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황정견, 조보지, 장뢰와 더불어 소문사학사로 일컬어진다. 대표 작품으로 <작교선(鵲橋仙)>, <회남거사장단구(淮海居士長短句)>가 있고, 저서로 회남집(淮海集)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관 [秦觀] (중국인물사전, 한국인문고전연구소)

   황정견의 자는 노직(魯直), 호를 산곡도인(山谷道人), 부옹(涪翁), 예장황선생(豫章黄先生)이라 했다. 홍주(洪州) 분녕(分寧, 지금의 장시(江西)성 슈수이(修水)) 사람이다. 그는 수사와 꾸밈을 추구하고 깊이에 힘을 쏟아 강서시파의 조종(祖宗)으로 추대 받았다. 그는 두보를 추앙했으며, 학문에 있어서는 과거의 문장이나 시구를 빌려 자신의 학문을 도야하되 거기에 얽매이지 말고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산문도 잘 지었고 서법에도 능했는데,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3체를 모두 잘 써서 송사가(宋四家)’의 일원이 되었다. 시와 글씨 두 방면 모두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해서 시서쌍절이란 평가를 얻었다.

그는 소식의 문하로 장뢰, 조보지, 진관 등과 함께 소문사학사(蘇門四學士)’로 불린다.

[네이버 지식백과] 황정견 [黃庭堅] (중국인물사전, 한국인문고전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