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벽루(涵碧樓)
태인면 태성리 일등(一等) 도로변(1等道路邊) 연방죽 가운데(蓮池中)에 있으니 1918년에 김우섭씨(金禹燮氏)의 발기(發起)로 지역유지(當地有志)들이 협력하여 건축한 것인데 목조2층으로 구조가 정교할 뿐 아니라 주위의 풍경(風景)이 뛰어나게 아름다워(絶佳) 봄의 앵화(櫻花, 앵두나무 꽃)와 여름의 녹음(綠陰)과 가을의 연꽃(蓮花)은 시인묵사(詩人墨士)의 산책에 적당하며 행인과객(行人過客)의 장루(杖屢)를 끄을게 된다 이러므로 음풍명월(吟風明月)의 성(聲)이 항시부절(恒時不絶)하며 현재는 당지인사(當地人士)들의 구락부(俱樂部) 또는 사정(射亭)으로 사용되고 있다.1)
춘추 시대 초 공왕(楚共王)의 장군인 양유기(養由基)가 100보 떨어진 거리에서 버들잎을 활로 쏘아 백발백중시켰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4 周本紀) 그리고 옛날에 활을 쏠 때에는 네 개의 화살을 발사하는 것이 예법이었는데, 《시경》〈제풍(齊風) 의차(猗嗟)〉에 “쏘기만 하면 과녁을 꿰뚫으며, 네 개의 화살을 한곳에 거듭 맞혔네.〔射則貫兮 四矢反兮〕”라는 말이 나온다. 이 글이 연상되는 누각(樓閣)이다.
함벽루는 피향정 서쪽에 있으며, 연못으로 둘러 있으며, 사정(射亭)으로 1918년에 김우섭(金禹燮) 외 14명의 발의로 공사를 시작하여 1919년에 완공되었으며, 1991년에 중수되었다. 예전에는 태산 군내 궁사들의 궁도수련장으로 운영되어 매년 전국 규모의 궁도대회 등을 개회하여 왔다. 현판인 함벽루의 휘호는 명필인 김돈희(金敦熙) 선생의 글씨이다. 지금은 태인 청년회의소 건물로 쓰이고 있다.
피향정(披香亭)의 서남(西南)쪽에 있으며 주위가 하연지(下蓮池)로 둘러싸여 있는 함벽루(涵碧樓)는 1918년 김우섭(金禹燮) 외 14이 발기하여 십시일반 자금을 모아 사정(射亭)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세웠다.
양노당, 태인, 산내, 용북(현 신태인지역), 감곡, 옹동, 칠보, 보림, 산외, 고부, 만경지역의 150여명 이상의 인근 지역 유지들이 참여하여 1918년(戊午年) 가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19년(己未年) 가을에 완공한, 목조 2층 (木造二層) 단청루정(丹靑樓亭)으로 단아(端雅)한 누각(樓閣)으로 건립했다.
특이한 점은 대녀 박월순(大女 朴月順)이라고 쓰여진 것으로 봐서 여성도 참여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한때는 사정(射亭; 활터)으로 태산(泰山) 군내 궁사들의 궁도수련장으로 사용되어 매년 전국 단위 궁도대회도 개최하였 왔다.
그 후 건물이 쇠락하자 1966년 지방인사들이 목조와즙(木造瓦葺) 정면 5칸의 목조 단층 팔작지붕집으로 중건하였고, 사정(射亭)으로서의 기능도 상실되었다. 이 당시 중건한 규모는 앞 3칸, 옆 3칸(125, 245, 245×125, 276, 125)
세월이 지나 이 건물이 퇴락하자 1971년 지방인사들이 목조와즙(木造瓦葺) 단층 5칸 팔작지붕집으로 중건하였다.2)
1979년부터 태인청년회의소(JC)에서 사무국으로 사용하면서 관리해 오던 중 1991년에 중수되었다.(?) 1997년에 정읍시의 지원으로 전면 개보수를 하여 유지되었으나 2007년 피향정 주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90여년의 영욕을 뒤로 한 채 함벽루를 사라지고 그 자리에 소공원이 조성되었다.
건물 전면에 걸린 ‘함벽루(涵碧樓)’라는 현판 글씨는 한말의 서예가인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6)가 해서(楷書)로 장중(莊重)하게 눌러쓴 것이다. 이 글씨는 아마도 태인의 명필인 몽연(夢蓮) 김진민(金鎭珉)을 가르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써 준 것으로 알려졌다. 김진민의 스승인 김돈희는 가끔 태인에 내려와서 이 고장의 문인묵객들과 교유하였고 읍원정(挹遠亭)의 ‘호상소유(湖上小游)란 현판도 남겼다. 함벽루는 연(蓮)이 가득 심어진 하연지(下蓮地)에 둘러싸여 있으며, 함벽루 동쪽의 돌다리를 건너가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자건축물이자 호남 5대 정자 중 으뜸으로 꼽히는 피향정(彼香亭, 보물 제289호)이 있다. 예전에는 피향정 동북쪽에 상연지(下蓮地)도 있었는데 상연지는 매립되고 현재 하연지만 남게 되었다.
2009년에 하연지에 새로 재건한 정자에 함벽루(涵碧樓) 현판이 어설프게 달려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측은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함벽루 기념비(涵碧褸 記念碑)
계장(契長) 김우섭(金禹燮)
유문길(柳文吉) 김석곤(金晳坤) 송수규(宋洙奎) 김기곤(金箕坤) 김재일(金在一) 시재선(柴在璿) 김영곤(金永坤)
김혜곤(金惠坤)박종엽(朴宗燁) 김용곤(金勇坤) 송수강(宋洙康) 오석봉(吳錫奉) 송윤권(宋允權) 김환(회?)곤(金渙3)坤)
歲戊午秋棟樑起至己未秋軒窓具迄届一週而斯
樓乃成焉其事巨力綿可知也苟非羣彦之殫心出
義則豈可得乎遂伐石而紀事擢其効責者十四人
別其項而額其名又以優等捐助者二百餘人序以
鐫之繼以僉謀貟三百餘人作契命名曰涵碧褸俱
樂契扢是乎騷人諷詠而歸射夫觀德而會琴而嘯
而醉而歌而之各得其樂者具美焉噫石奚足恃也
又過幾百年則風雨磨之矣苔蘚侵之矣第其永守
之節留竢後來人之随而耳之金海人金炳柱 撰
己未仲秋
무오년 가을에 누각의 들보를 세우고 기미년에 마루와 창을 갖추니 일년에 걸쳐 다락이 완성되었다. 그러고 보니 누각 지은 것이 큰 일이었다. 참으로 여러 사람의 노고가 아니었으면 되지 않을 일이다. 비석에 그 공로자 열네사람이 이름을 별도로 적고 돈을 내주신 이백여 사람을 차례로 새기고 이어서 삼백여명의 계를 조직하였다. 그리도 다락(涵碧褸)의 이름을 함벽루라 하였다. 소인(騷人)이 시를 읊고 돌아 갔으며 활을 쏘고 또 거문고를 켜고 휘바람을 부는 등 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노래를 하며 각기 즐거어했다. 슬프다 비석인들 몇백년 뒤에는 비바람에 할퀴고 이끼가 쩌지니 말이다. 후진들이 계속해서 중수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기미 중추에(1919년)
김해인 김 병 주 찬
함벽루중수기(涵碧樓重修記)
本涵碧樓는 泰仁故金禹燮氏의 發起로 郡內有志의 協助를 얻어 西紀一九一八年 端雅한 丹靑木造二層을 建立하였다. 正△가 秀麗한 泰仁精氣를 모은 披香亭과 雙璧을 이루어 蓮香속에 묻혀있는 本涵碧樓는 뜻있는 湖南人士들은 勿論 지나는 詩人墨客의 由緖깊은 遊詠處로서 자랑이 있던바 六二五動亂의 慘禍를 입어 倒壞直前에 놓여있음을 본 井邑郡守 申祥雨氏께서 이를 아까웁게여겨 拾六萬원을 마련하여 주시고 面內有志의 敦篤한 協贊을 얻어 重修에 着手 오늘 完修를 본것이다. 西紀一九六六年 七月九日 涵碧樓重修推進委員會
함벽루 중수기념비(涵碧褸 重修記念碑)
양노제(養老齊), 홍수표(洪洙杓), 송인근(宋麟根), 김진영(金鎭榮), 시태석(柴太碩), 송순상(宋順相),한백수(韓柏洙), 송길상(宋吉相), 송영승(宋榮昇)
우리의 선인(先人)들이 숭고(崇高)한 뜻을 기우려 창건(剏建)한 이 누각(樓閣)은 오십여 성상(五十餘 星霜)이란 짧은 역사(歷史)이나마 태인 사회(泰仁 社會)에 끼친 공적(功績)은 지대(至大)한바있어 궁도(弓道)의 도장(道場)으로서 또는 젊은이들의 정신문화육성전당(精神文化育成殿堂)으로서 많은 사회적 가치(社會的 價値)를 형성(形成)해왔든 바 불행(不幸)이도 해방(解放) 후(後) 사회(社會) 여건(與件)에 의(依)한 관리(管理) 소홀(踈忽)로 붕괴(崩壞) 직전(直前)에 놓여있어 뜻있는 이의 심금(心琴)을 아프게 하던 중 상기(上記) 8인의 심혈(心血)을 경주(傾注)한 노력(勞力)과 별기(別記) 17인의 절대적(絶對的)인 성원(聲援)하에 미흡(未洽)하나마 중수(重修)의 역(役)을 다함에 있어 거읍적(擧邑的)인 치하를 아끼지 않음은 물론(勿論) 후일(차(後日此樓)의 발전(發展)과 보전(保全)에 어긋남이 없다면 이로서 ○반(般) 중수(重修)의 뜻을 다 하는가 하노라.
1971년 신해(辛亥)성하(盛夏) 8월 일
태인초등학교 61회 동창회 카페
김우섭(金禹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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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張奉善,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36. 11. 20.), 20.
2) 임남곤, 『井邑文化財誌』(井邑文化院, 1999. 12. 30), 573.
3) 渙 ,흩어질 환, 물 이름 회
4) 둔헌유고,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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