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인 노휴재(泰仁 老休齋)
소재지: 태인면 태인로 83
노휴재는 군내(郡內)에서 가장 역사가 길고 유일(唯一)한 전통 노휴재이다.
1857년(철종 8, 丁巳) 1월 창건할 때 최정한(崔正漢)·송기천(宋基天)·김치희(金致熙) 등이 주도하였다.
그 후 1905년 2월 송영진(宋瀅鎭) 외 5인에 의해 중건(重建)되었으며, 1933년 2월 중건할 때는 김재일(金在一)이 이끌었다.
노휴재의 중앙 정면에는 '노휴재(老休齋)'라는 현판(懸板)이 걸려있는데 창건 당시의 쇄예(碎藝)의 글씨로 141년 전의 명필(名筆)이다.
1978년 8월 사업을 개시하면서 회원 일동의 출연금(出捐金)으로 효행자(孝行者) 표창 및 장학금(奬學金) 수여 등을 연례행사로 시행하고 있다.
그동안 태인 인근의 유림(儒林) 가운데 교양과 덕망이 있는 사람은 대부분 이곳을 거쳐 갔다 한다.
태인 노휴재의 회원은 부속시설인 읍원정(揖遠亭, 時亭) 회원 가운데 만 65세 이상인 사람을 자동으로 영입하게 된다.
태인노휴재와 같은 목적에서 설치된 읍원정(揖遠亭)은 1855년(철종 6, 乙卯) 현감 이승경(李承敬) 외 49명의 발의로 항가산 중턱에 해당하는 태인면 태성리 152-2번지에 창건되어, 회원들이 수시로 모여 음풍영월(吟風詠月)하녀 군자의 길을 수련 연마하던 곳이다. 그 뒤 김재인의 노력으로 중건되고, 유지답(維持畓)의 수입으로 운영하고 있다.
태인양노제기념비문(泰仁養老齊記念碑文)
삼옹(三翁)이 이 재재를 창건한지 이미 124성상(星霜) 년륜(年輪)을 거듭할수록 우여곡절(迂餘曲折)이 많았을 터이나 그 전통은 변함없이 면면히 발전을 거듭해 왔음은 오로지 선인(先人)들의 숭고한 노력의 대가라 생각할제 우리는 다 함께 머리 숙여질 뿐이다.
그러나 시대의 추이(趨移)에 따라 우리 고유의 윤리(倫理)는 점점 빛을 잃고 외래의 풍습에 물들어 목불인견(目不忍見)의 현상이 한둘이 아니어든 어찌 뜻있는 이의 탄식 소리가 그칠 것이며 하물며, 우리 늙은이로서의 장탄식(長歎息)이야 말해 무엇하리요.
다행이 우리 재원(齊員)들의 뜨거운 애향(愛鄕) 애국심(愛國心)의 말로로 푼푼의 연금(捐金)을 모아 효상(孝賞)과 권학(勸學)의 제(制)를 제기(提起)하여 우리 고유의 문화를 수호하고 몰니(沒泥)된 도의(道義)를 바로잡고저 물심(物心)을 기울이니 그 아니 흐뭇하리요. 유유(悠悠)히 흐르는 강물은 그칠줄 모르나니 우리의 그 뜻을 길이길이 보존하여 동방(東方)의 예풍(藝風)이 만방(萬邦)에 빛난다면 그 아니 좋을손가.
태인(泰仁) 양노재원(養老齊員) 일동(一同)
장흥(長興) 고광준(高光準) 서(書)
태인 노휴재 연혁(沿革)
본 노휴재는 군내(郡內)에서 가장 역사가 길고 유일(唯一)한 전통 노휴재이다.
· 서기 1857(철종 8년) 정사(丁巳)년 1월 창건시(創建時) 발통인(發通人)은 최정한(崔正漢) 송기천(宋基天) 김치희(金致熙)이다.
· 소재지(所在地)는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井邑市 泰仁面 泰興里) 415번지이다.
· 중건(重建)은 1905년 2월 송영진(宋瀅鎭)외 5인이다.
· 1933년 2월 중건(重建)시 출의인(出義人)은 김재일(金在一)이다.
· 1978년 8월 사업을 개시(事業, 開始)하면서 본 계원( 員) 일동(一同)의 출의금(出義金)으로 효행자(孝行者) 표창 및 장학금(奬學金) 부여(付與) 등 연례(年例) 행사로 시행하고 있음.
· 그간 태산현(泰山縣) 관내 각면(各面) 유림(儒林) 가운데 교양(敎養)과 덕망있는 사람은 거계(擧皆)가 본재(本齋)를 거쳐 갔다.
· 본재(本齋)의 재원(齋員)은 부속시설(附屬施設)인 읍원정(揖遠亭, 詩亭) 회원 가운데 만 65세 이상인 사람이 자동적(自動的)으로 영입(迎入)하게 된다.
· 현재원(現齋員) 29명이며 예비회원(豫備會員) 12명으로 합하여 41명이다.
· 본재 현판(懸板)인 노휴재(老休齋)는 창건당시의 쇄예(碎藝)의 글씨로 141년 전의 명필(名筆)이다.
태인 노휴재와 같은 목적에서 설치된 시정(詩亭)으로 읍원정(揖遠亭)은 1855년(철종 6년) 을묘년(乙卯年) 현감(縣監) 이승경(李承敬)외 49명의 발의(發議)로 태인면 태성리(泰成里) 152번지의 2에 창건되어 수시로 모여 음풍영월(吟風詠月)하며 군자(君子)의 길을 수련 연마하던 곳으로 그 뒤 김재일(金在一) 독지로 중창(重 )되고 유지답(維持沓)의 수입으로 운영되고 있다.
태인 노휴재 주련 해제(泰仁 老休齋 柱聯 解題)
蓬茨數間己信淸約
허름한 초가(草家) 몇 칸(間)에서 지내면서 이미 청렴(淸廉)과 검소생활(儉 素生活)이 몸에 배었는데
棟甍大厦邃見洪量
기와용마루 큰 집에 들고 보니 좁았던 도량(度量)이 한결 커짐을 엿볼 수 있구나.
天下達尊齒德兼備
온누리의 사람으로부터 존경(尊敬)을 받으려면 나이와 함께 지덕(知德)을 아울러 갖추어야 한다.
人間休福形役渾忘
인간(人間)의 참다운 행복(幸福)은 마음이 육체(肉體)의 굴레에서 벗어남에 있으니 물욕(物慾)에서 벗어나야 한다.
庠序之敎事其長上咏
옛 태학(太學)의 가름침은 어른을 공경(恭敬)하고 부모(父母)에게 효도(孝 道)함이니 향당막여치(鄕黨莫如齒)지키리
凡令鄕黨敢不追崇
오늘날 우리 고을 촌노(村老) 어찌 감히 선현(先賢)의 가르침을 숭상(崇尙) 하고 따르지 않으랴.
在昔周文酒爲善養
옛날 주(周)나라 문왕(文王)은 적량(適量)의 술은 좋은 영양제(營養劑)로 삼 고 애음(愛飮)했다지만
肉米之體出於朝廷
우리 일상(日常) 식생활예절(食生活禮節)은 나라에서 보인 절차(節次)에 따 라 어긋남이 없어야 하며
觴咏有時勝於絲管
명정(酩酊)에 취(醉)하여 고시조(古時調) 한 수(首) 읊으니 거문고 치고 풍악 (風樂)에 비할건가.
棋談消日宜若竹樓
세파(世波)의 괴로움을 잊고 장기바둑으로 소일(消日)하니 상쾌함이 죽루(竹 樓)에 비할건가.
適宜起居淸風明月
뜻에 따라 기거(起居)하니 그 기분(氣分) 청풍명월(淸風明月)이요.
從容談笑白髮蒼顔
마음 비우고 담소(談笑)하니 백발홍안(白髮紅顔)에 동심(童心)이 감돌고
偃仰屈伸彷彿
자유(自由)로운 기동청정(起動淸淨)한 환경(環境)이니 어찌 옛 신선 팽조(彭祖)의 생활(生活)과 다름없고
呴虛呼吸何羡長松
들어쉬고 내뿜는 호흡(呼吸)이 상쾌한 그 기분 어찌 낙락장송(落落長松)을 부러워 할 소냐.
極星臨門瑞彩絢爛
북극성(北極星)이 문(門)에 비취어 찬란한 서기광채(瑞氣光彩)가 눈이 부시구나.
海籌添屋永年幾多
중지(衆智)를 모아 우리 보금자리를 쓸고 닦아 면면(綿綿)히 발전(發展)토록 힘쓰리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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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남곤, 『井邑文化財誌』(井邑文化院, 1999. 12. 30), 666∼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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