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성묘(關聖廟)
위치는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1길 53-3.
묘명(廟名)은 관성묘(關聖廟) 1831년(純祖 31).
뒤편의 대숲속에 있는 건물지는 약 100년 전부터 관운장(關雲長)을 모시던 사당터인데 1995년경에 철거된 유적이다. 이 사당을 관성묘(關聖廟)라고 하는데 철거당시에도 많이 훼손되어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건립시기(建立時期)는 1831년(純祖 31)1)에 참봉(參奉) 송석진(宋錫珍)2)이 가문의 여력을 모아 관운장을 향사(享祀)하기 위해 지은 사당이라는 설과 1891년(高宗 28)3)에 세웠다는 두 설이 있으며 1980년 후반쯤 없어졌다.
관왕묘(關王廟)의 특징(特徵)은 중앙정부나 지방단체가 아닌 개인에 의해 지어진 사당으로서 관운장을 향사(享祀)하는데 별도의 제원들을 두어 그의 생신(生辰)일인 매년(每年) 6월 24일(陰)과 기일(忌日)인 10월 19일(陰)에 제사(祭祀)를 지낸다.
어릴 적 읍원정(相遠亭) 뒤편의 대숲 속에 싸여있는 계단을 한참 올라가면 항가산 중턱에 자리잡은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무장 관우(關羽, 관운장)를 모시는 관성묘(關聖廟)가 있었다.
관왕묘는 기와 맞배지붕에 익공(翼工)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청(丹靑) 건물이나 현재(現在)는 모두 헐리어 없어졌고 터만 존재(存在)한다.
종교색채(宗敎色彩)는 민간신앙(民間信仰)인데 관성묘는 후대에 증산교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4)
태인면(泰仁面) 태흥리(泰興里) 읍원정(挹遠亭)의 후면(後面)에 있으니 1891년(辛卯)에 전(前) 참봉(參奉) 송석진(宋錫珍)의 창건으로 관공(關公)을 제사(祭祀)하는 묘우(廟宇)이니 매년 공(公)의 탄신일(誕辰日)인 6월 24일과 그 휘일(諱日, 조상(祖上)의 돌아간 날)인 10월 19일, 즉 연 2회의 제식(祭式)을 행하였다. 우금(于今)은 지역유지(地域有志)의 부인(婦人)들이 계(稧)를 만들어 계(稧)의 재산(財産)으로 연 2회의 제식(祭式)을 거행(擧行)하여 왔다.
주(註) 관제(關帝)의 명(名)은 우(羽)요, 자(字)는 운장(雲長)이니 거금 2300여 년간(1936년 기준) 중국 촉한(蜀漢) 昭烈皇帝 詩人으로 용맹(龍猛)이 초인(超人)하며 의기(義氣) 풍부(豐富)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에 공(公)의 유령(幽靈)의 암조(暗助)가 많았다하여 조선(朝鮮)에 비로소 관제묘(關帝廟)를 설치하였으니 경성(京城)에는 동묘(東廟) 남묘(南廟), 태인에는 관제묘가 있었다.5)
관왕묘(關王廟)
태인면 태흥리 항가산 중턱에 있다. 송석진과 유림이 창건. 매년 공(公)의 탄신일(誕辰日)인 6월 24일과 그 휘일(諱日, 조상(祖上)의 돌아간 날)인 10월 19일, 즉 연 2회의 제식(祭式)을 행하였다.6)
관제묘(關帝廟)
1891년(高宗 28)에 전 참봉 송석진(前 參奉 宋錫珍)의 창건으로 관운장(關雲長)을 제사하니 매년 그 탄신일인 6월 24일과 기일(忌日)인 10월 19일 연2회에 제사를 지낸다.
관운장(關雲長; 명 羽· 字 雲長)은 중국 3국시대 의리와 용맹을 떨친 위인이니 조선 임진란에 관운장의 유령의 가호가 있었다하여 한양(漢陽)에 동묘(東廟)와 남묘(南廟)를 창건하여 관운장을 제사하였다. 도내에는 전주시와 남원시(남원시)에 관왕묘(關王廟)가 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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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읍시사 -上』, 정읍시사편찬위원회, 2003, p.167. 또는 임남곤, 『정읍향리지』, 정읍문화원, 2002, p.619.
2) 송의섭(宋宜燮) : 1834(순조34년)∼1916 본귀(本貴)여산(礪山), 자는 자준(子俊), 호는 춘계(春溪) 일명 석진(錫珍), 태인(泰仁)에서 출생하여 소영원(昭寧園) 참봉(參奉)으로 효우근천(孝友根天)하였으며 일찍이 관우(關羽)의 현몽(現夢)으로 1891(고종28년) 태인 항가산(泰仁 恒迦山)에 관제묘(關帝廟)를 세웠다. 1903(광무7년) 명정(命旌)이 내렸다.
3) 『정읍문화재지』, 정읍문화원, 1999, p.550.5) 張奉善,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36. 11. 20.), 52.
6) 梁昌成...[等編], 『泰仁誌』(1965), 79.
7) 『내 고장 傳統文化』 (정읍군청공보실, 1983. 11. 9.), 270.
참고 자료:
國內 關羽廟의 現況과 受容에 대한 硏究1)
閔 寬 東⋅裵 玗 桯*
※ 위 논문에서 일부를 발췌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와 함께 유입된 관우신앙은, 명나라 장수 진인(陳寅)이 1598년 남대문 밖 남산기슭에 관우묘를 건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선시대 대략 27곳 이상에서 관우묘가 건립되었는데 그중 현존(現存)하는 곳은 14곳으로 확인된다.
관우묘는 주로 왜군과의 격전지에 건립되었으며 건립주체는 대개 명나라와 조선왕실 및 민간의 주도로 건립하였다. 관우묘의 명칭(名稱) 또한 초기에는 주로 광왕묘(關王廟)로 부르다가 후대에는 관제묘(關帝廟) 및 관성묘(關聖廟)로 격상되었다.
관우묘는 초기에 주로 단순한 유교적 사당의 의미로 참배되었다. 그러나 肅宗과 英⋅正祖 및 高宗 등이 직접 관우묘에 참배하며 의례화(儀禮化)하였고 또 이러한 공식의례를 통하여 정치적 명분과 왕실안정의 의도로도 활용하였다.
조선후기(朝鮮後期)로 들어서며 관우신은 민간신앙 및 무속신앙으로 이어지고 급기야는 종교화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이렇게 관우신앙이 무속신앙으로 발전한 데에는 고종(高宗) 때 무녀(巫女) 진령군(眞靈君)과 현령군(賢靈君)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또 한편으로는 선음즐교(善陰騭敎)⋅증산교(甑山敎)⋅관성교(關聖敎0가 출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관우묘의 건립과 함께 시작된 관우전설은 약 23종이 있는데 크게 현몽류(現夢類)⋅현령류(顯靈類)⋅치병류(治病類)⋅기복류(祈福類)⋅금기류(禁忌類) 등으로 분류된다. 전설에 나타난 관우는 초기에는 충의(忠義)를 겸비한 군신으로 국가수호(國家守護)와 왕실안정(王室安定)을 담당하는 수호신이었지만, 후대 민간에 수용되면서 재물신(財物神)⋅발복신(發福神)⋅치병신(治病神) 등 다양화된 만능신(萬能神)으로 변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중국소설논총(中國小說論叢) 제(第) 45(輯)에는 총 27개로 확인된다. 그 중 서울에 건립된 관우묘는 7군데이며, 경북에 2군데, 경남 2군데, 전북 5군데, 전남 3군데, 경기도 강화도 4군데, 개성 1군데, 충청도 1군데, 강원도 1군데, 평안도 1군데 등 전국적으로 분포되었으나 비교적 서울과 전라도에 집중되었다. 그중 유실(遺失)되었거나 미상(未詳)인 곳이 13개가 있어 현재는 14개만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등장하는 12장신의 영정을 모셔놓은 신당과 제갈공명을 모시는 와룡묘(臥龍廟)와 제후묘(武侯廟)도 확인되었다.
관우묘의 명칭은 관왕묘(關王廟)⋅관후묘(關侯廟)⋅관성묘(關聖廟)⋅관묘(關廟)⋅관운묘(關雲廟)⋅관제묘(關帝廟)⋅성제묘(聖帝廟)⋅관황묘(關皇廟)⋅숭의묘(崇義廟)⋅관성사(關聖祠)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고 있다. 그중 관왕묘라는 이름이 8군데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관성묘(5군데)와 관제묘(4군데)순이다. 관우묘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즉 선조시대(宣祖時代) 건립된 관우묘는 대부분 관왕묘(關王廟)라 이름을 붙이다가, 그 후 특히 고종(高宗)때 부터는 관성묘(關聖廟)⋅관제묘(關帝廟)⋅관황묘(關皇廟)⋅관제묘(聖帝廟) 등으로 바뀌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관우가 송(宋)나라 휘종(徽宗)때 무안왕(武安王)으로 봉해졌다가, 1614년(明 神宗)때 관성제(關聖帝)로 칙봉(勅封)되었기에 명칭 또한 변화가 생긴 것이며, 여기에 고종(高宗)이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황제(皇帝)로 즉위하면서 관우의 칭호도 관제(關帝)로 격상시킨 것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또 서울과 강화도의 관우묘는 묘당의 위치에 따라 동묘⋅서묘⋅남묘⋅북묘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관우묘의 건립주체는 크게 명나라와 조선 정부 그리고 민간으로 나누어진다. 1598년(宣祖 31)부터 1601년(宣祖 34)까지 세워진 6군데의 관우묘는 명나라의 장수들이나 명황제(明皇帝)의 명을 받들어 건립된 것이다. 즉 임진왜란 중 화의교섭의 결렬로 일어난 정유재란(1597-1598) 때 세워진 관우묘가 대부분인데 이는 관운장이 곳곳에 현령(顯靈)하여 명나라 군대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믿었기에 이를 기념하여 건립한 것이다.
그 후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민간에서 관우를 제사(祭祀)하는 유교적 색채가 강한 사당이나 혹은 민간신앙 형태의 사묘(祠廟)가 간헐적으로 건립되기 시작한다. 그러다 고종연간(高宗年間)에 들어서면서 관우묘의 건립은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선조(宣祖) 이후(以後) 왕실주도(王室主導)의 관우묘가 처음 건립된 것은 1883년(高宗 20)에 서울시 송동(명륜동)에 세워진 북관왕묘(北關王廟)와 그 후에 세워진 숭의묘(崇義廟, 西廟)이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관우에 대한 숭배는 민간무속신앙으로 빠르게 퍼져나가 민간에서도 본격적으로 관우묘를 건립하여 신으로 모시게 되었다. 또 기존에 유교사당(儒敎祠堂)의 색채가 강했던 관우묘도 도교적(道敎的) 색채가 강한 민간무속신앙으로 변질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상의 자료에 근거하여 건립시기를 분석하면 건립시기가 주로 임진왜란과 조선말기로 집중된다. 이는 당시의 외우내환(外憂內患)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즉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처럼 위태로운 시기에 집중적으로 세워진 것은 나라의 난녕(安寧)과 국토수호(國土守護)를 바라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이라는 존재는 위기에 빠질 때마다 신에게 의지하며 기적을 갈망해 왔다. 이러한 기복행위(祈福行爲)는 신앙으로 이어져 많은 종교가 만들어 지고 또 흥망성쇠의 전철을 밟아왔다. 그 가운데 독특한 경로를 밟으며 발전해온 신이 중국의 관우신(關羽神)이다. 즉 관우신은 유교(儒敎)에서는 나라를 수호하는 충의의 무신(武神)으로, 불교(佛敎)에서는 사찰(寺刹)을 지키는 가람신(伽藍神)으로, 도교(道敎)에서는 악마를 쫓아내고 재난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삼계복마대제(三界伏魔大帝)로 수용되며 그야말로 만능수호신(萬能守護神)이 되었다.
대략 선조연간(宣祖年間)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명나라 군대와 함께 유입된 관우신은, 명나라 장수 진인(陳寅)이 1598년 남대문 밖 남산기슭에 관우묘를 건립하면서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 후 전국에 대략 27곳 이상에서 관우묘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곳은 14곳으로 확인된다. 관우묘는 주로 왜군과의 격전지 위주로 건립되었으며 건립의 주체는 크게 명나라와 조선왕실 및 민간에서 건립하였다. 관우묘의 명칭(名稱) 또한 초기에는 주로 관왕묘(關王墓)로 부르다가 후대로 오면서 관제묘(關帝廟) 및 관성묘(關聖廟)로 격상되었다.
관우묘는 초기에 주로 유교적 사당의 의미로 참배되었지만 후에 숙종과 영⋅정조 및 고종 등이 직접 관우묘에 참배하며 국가의례화를 하였다. 또 그들은 이러한 공식의례를 통하여 정치적 명분과 왕실안정 및 국가수호의 의도로 이용하였다.
관우신은 후에 민간신앙 및 무속신앙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종교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렇게 무속신앙으로 발전하게 된 데에는 고종연간(高宗年間)에 나타난 진령군(眞靈君)과 현령군(賢靈君)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 되었으며 이러한 계기가 민간무속신앙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사료된다. 한편으로는 선음즐교(善陰騭敎)와 증산교(甑山敎) 및 관성교(關聖敎)가 출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또 관우묘의 건립과 함께 관우에 대한 전설도 만들어지기 시작하는데 크게 현몽류(現夢類)⋅현령류(顯靈類)⋅치병류(治病類)⋅기복류(祈福類)⋅금기류(禁忌類) 등으로 분류된다. 전설에 나타난 관우는 초기 충의(忠義)와 무력(武力)의 힘으로 국가수호(國家守護) 및 왕실안정(王室安定)을 주로 담당하는 수호신이 되었다가, 후대에 민간으로 수용되면서 본래의 관장업무가 재물신(財物神)⋅발복신(發福神)⋅치병신(治病神) 등 전지전능(全知全能)한 만능신(萬能神)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만능신(萬能神) 관우(關羽)는 중국에서는 그 세력을 점점 확장하며 발전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역사를 뒤로한 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점차 잊혀져가고 있다.
관우(關羽, 162년?~219년)는 중국 역사상 가장 특이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된다. 살아서는 살인도주범에서 장군(將軍)으로, 장군(將軍)에서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또 죽어서는 후(侯)에서 공(公)으로, 공(公)에서 왕(王)으로, 왕(王)에서 제(帝)로, 제(帝)에서 신(神)으로 추존되다가, 급기야 명말청초(明末淸初)에는 공자(孔子)와 함께 중국의 문무이성(文武二聖)으로 추존되는 영광을 누린다.1) 이러한 관우숭배(關羽崇拜)의 배경에는 물론 명대(明代) 4대기서(四大奇書)인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가 보편화됨에 따라 이루어진 영향도 있었지만 특히 송(宋)⋅원(元)⋅명(明)⋅청대(淸代)에 이루어진 정치적 의도와 종교적 영향에서2) 기인(起因)된다.
관우에 대한 국내 최초기록은 삼국시대에 유입된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로 추정되며, 소설로의 유입은 고려 말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이다.3) 그러나 당시에는 관우라는 인물이 크게 주목받지는 못하다가 나관중의 『삼국지통속연의』가 국내에 유입(대략 1500년대 초⋅중기로 추정)되면서 널리 알려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1567-1606년(宣祖年間)에는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이 유입과 국내출판(1560년대 초⋅중기)이 이루어지면서 문인 및 백성들 사이로 폭넓게 저변이 확대되었고, 급기야 임진왜란(1592-1598년)이 끝날 무렵에는 관우묘(關羽廟)가 국내에 설립되면서 관우를 신앙으로서 받아들이는 입지가 공고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타의(他意)에 의하여 세워진 관우묘(關羽廟)이지만 “충(忠)과 의(義)”의 상징인 “관우”를 수호신으로 수용함으로써 국가의 안위와 백성들을 지키고자 하는 표면적 의도와 또 다른 정치적 의도도 그기저에 깔려있었기에 관우묘(關羽廟)는 점차 관우신앙으로 확대 전파되었고 관우묘에 대한 의식 또한 정치적 혹은 사회적인 변수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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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우(關羽)는 죽어서 수(隋) 문제(文帝)때 충혜공(忠惠公)으로 칙봉(勅封)이 되었고, 송(宋) 휘종(徽宗)때 무안왕(武安王0으로 봉해졌다가, 1614년(明 神宗)에 관성제(關聖帝)로 칙봉(勅封)되었다. 또 명말청초 이전에는 문성(文聖)으로 공자(孔子)를, 무성(武聖)으로 여상(呂尙) 강태공을 문무이성(文武二聖)으로 추존하였으나 후에 무성(武聖)을 관우로 대치하였다.
2) 송대 휘종연간(徽宗年間)에 금나라의 침략으로 어지러운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염원에서 관우를 무안왕(武安王)으로 봉하였고 명대에는 태조 주원장과 영락제(永樂帝때)에 영험이 나타나며 관우신(關羽神)은 본격적으로 숭배의 대상이 된다. 청대 또한 한족의 효율적 통치를 위해 관우신을 수용함으로 확고한 관제신앙으로 발전한다. 또 송대부터 본격적 체계를 갖춘 도교의 부흥과 함께 관우신앙은 종교적인 측면에서 신격화(神格化)되며 자리를 잡아나가는 양상을 보인다.
3) 민관동, 「삼국지연의의 국내 유입과 출판」, 『중국문화연구』 제24집, 209쪽 참고.
國內 關羽廟의 現況과 受容에 대한 硏究 / 89
閔寬東, 裵玗桯, 2015, 「國內 關羽廟의 現況과 受容에 대한 硏究」, 『中國小說論叢』 Vol.45 한국중국소설학회, 87-114(28쪽)
* 閔寬東: 慶熙大學校 中語中文學科 敎授
裵玗桯: 慶熙大學校 大學院 中語中文學科 博士課程修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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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대순진리회 답사기 - 태인 관왕묘
대순진리회 연구위원 신상미
얼굴의 솜털을 간질이는 시원한 바람을 따라 전라도 태인에 이르렀다. 상제님께서는 전국 많은 곳을 다니셨지만 태인은 유독 상제님과 종도들의 숨결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전경』을 보면 도주님께서 감오득도하신 후 “왜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느냐.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라는 상제님의 명을 받고 태인에 오셔서 무극도장을 마련하셨다.01 그리고 상제께서 자주 태인에 머무셨던 것은 도창현(道昌峴)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곳에 신경원(辛京元) ⋅ 최내경(崔乃敬) ⋅ 최창조(崔昌祚) ⋅ 김경학(金京學) 등의 종도들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02
상제께서 도창현이 있기에 태인에 자주 머무셨다고 한 것을 보면, 도창현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지명인 듯하다. 도창현은 도챙이 고개, 돌챙이 고개라고도 하며 삼리(三里) 마을 동북쪽에서 독양(犢養) 마을로 넘어가는 항가산(恒伽山) 중턱의 고개를 가리킨다. 항가산은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 있는 야트막한 산으로 조선 시대에 사림(士林)의 소유지였으며 풍치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항가산에는 한국불교태고종 소속 전통사찰인 다천사(茶泉寺)가 있으며, 1855년 태인 현감이 선비들에게 문학을 권장하기 위해 처음 세웠다는 읍원정(揖遠亭)과 조선 중기에 태인 현감, 상주목사 등을 지낸 신잠(申潛, 1491~1554)의 사당도 있다. 또한 항가산 중턱에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무장 관우(關羽, 관운장)를 모시는 관왕묘(關王廟)가 있었다. 관왕묘는 1831년(순조 31)03에 송석진(宋錫珍)이 세웠다는 설과 1891년(고종 28)04에 세웠다는 두 설이 있으며, 1980년 후반쯤에 없어졌다.
이곳 관왕묘는 종도 신경언(辛敬彦)이 상제님을 따르기 전에 제원으로 있던 곳으로 비록 사라지고 없지만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곳 중의 하나이다. 『전경』에 상제께서 신원일을 데리고 신경언과 그의 가족에게 “관운장이 조선에 와서 받은 극진한 공대의 보답으로 공사 때에 반드시 진력함이 가하리로다” 하시고 양지에 글을 써서 불사르셨다는 부분이 있다. 그 후 이튿날 봉심할 때 관운장의 삼각수 한 갈래가 떨어져 간 곳이 없으므로 제원들이 괴상히 여겼는데 신경언은 상제께서 행하신 일이라 생각하고 공사에 진력하기 위하여 비록 초상으로도 그 힘씀을 나타내는 것이라 깨닫고05 상제님을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사라지고 없는 관왕묘는 읍원정 뒤편의 숲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즉, 읍원정의 주소가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 152-2번지이고, 관왕묘의 주소가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 152번지였다. 관왕묘를 지켰던 송석진의 자손인 송수현의 친구 박노환(69)씨를 통해 사라진 태인 관왕묘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06 송석진의 꿈에 관운장이 나타나서 “이곳에 사당을 세워라!” 하였기에 항가산 중턱에 자비로 관왕묘를 지어 자손 대대로 관리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후손 송수현이 전주 사람인 이의철에게 팔아 버렸다. 그 후에 이 소식을 들은 제원들이 다시 찾고자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지만 그 행방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박노환씨는 하마비(下馬碑)07만은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에 관리하고 있다.
제원들은 관운장의 영(靈)이 이곳에 계신다고 하면서 빈터에 찾아와 관운장의 생신일인 음력 6월 24일과 기일인 음력 10월 19일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젠 그 터마저 사라지고 당시에 믿었던 제원들도 돌아가신 분들이 많아서 발걸음이 끊긴 상태다.
관왕묘가 사라지고 뒤이어 관왕묘가 있던 항가산의 일부분도 사라져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항가산의 일부분은 태인-원평간 도로건설공사 중 터널공사를 위한 발파작업으로 인해 사라진 것인데 마치 그 모습이 산을 크게 한입 베어 먹은 듯하다.
관왕묘의 모습을 알 길 없었으나 박노환씨의 인터뷰와 자료들로 짐작이나마 할 수 있었다. 관왕묘의 입구에는 솟을대문08으로 되어 있었으며 입구 가운데는 신도(神道)라 하여 다니지 못하도록 창 두 개가 X자 모양으로 가로막고 있었다고 한다. 양 옆으로 있는 두 문의 벽화에는 장비(張飛)가 문을 지키듯 그려져 있었고, 대문 옆으로는 대대로 송씨의 장손들이 관리하며 살았던 초가삼간이 있었다고 한다. 관왕묘 건물은 기와 맞배지붕09,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현판에는 ‘성제묘(聖帝廟)’라 적혀 있었다. 관성제군은 조각상으로 유리관에 모셔져 있었고 긴 수염에 붉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박노환씨는 『전경』에 나온 대로 관운장의 수염 중에 한 개가 없어진 것을 보았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상제께서 관운장이 조선에 와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만큼 당시에는 관제신앙이 정말 활발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왕실에서 먼저 관제를 모시기 시작하였다. 조선 숙종 이후 영조, 정조 등의 왕들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관제신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고종은 혼란한 정세에서 야기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명성황후와 함께 개인적으로 무속적인 관제신앙에 더욱 심취하였다고 전한다. 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이후 1902년에 관왕을 관제로 높이고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顯靈昭德義烈武安關帝)’라는 시호를 내릴 정도였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타의적으로 강요된 신앙이었기에 위정자들조차 믿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 후 한양에 동묘(東廟)와 남묘(南廟)를 창건하여 관운장의 제사를 모시는 등 적극적인 정책을 편 결과 민간에게도 관제신앙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고종 대에 자신의 몸에 관제가 내렸다고 주장하는 무당이 많이 나타나 민간에 급속도로 퍼져 나간 것이라 한다.10
『전경』 권지 1장 20절에서는 상제께서 관운장의 얼굴 모습으로 변신하시는 내용이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관운장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느꼈으며, 제자들에게 관운장의 충의를 기리고 삶의 교훈으로 삼으라는 가르침을 내린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상제님과 종도 신경언이 있었던 때의 관왕묘는 사라지고 없지만 우리에게 관제는 전쟁 때 무(武)를 과시하는 신격이 아니라, 삿된 기운으로부터 수도인을 보호하는 신격으로 신앙되고 있음은 변치 않고 있다.
01 교운 2장 7절.
02 행록 4장 6절.
03 『정읍시사 -上』, 정읍시사편찬위원회, 2003, p.167. 또는 임남곤, 『정읍향리지』, 정읍문화원, 2002, p.619.
04 『정읍문화재지』, 정읍문화원, 1999, p.550.
05 권지 2장 21절.
06 2011. 8. 4. 인터뷰.
07 그 앞을 지날 때에는 신분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석비(石碑)이다. 대개 왕장(王將)이나 성현, 또는 명사ㆍ고관의 출생지나 분묘 앞에 세워졌다.
08 좌우의 행랑채보다 기둥을 훨씬 높이어 우뚝 솟게 지은 대문.
09 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
10 『신종교연구』10집, 한국 신종교학회, 2004, pp.51~83.
출처: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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