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문화유적(삶의 자취)/도지정 문화재

문화재 자료 - 태인 향교 대성전

증보 태인지 2018. 3. 14. 11:37

태인향교(泰仁鄕校) 대성전(大成殿)

 

   지정종별: 문화재자료 제75호(1984년 04월 01일)

   시     대: 조선 세종기

   소 재 지: 정읍시 태인면 향교2길 49-1

   면     적: 대성전 만화루 외 5동

 

 

 

 

 

 

   1386(고려 우왕 12) 에 태산(泰山인의(仁義) 두 현()에 향교를 건립하였으나 지금은 인의현(仁義縣)의 향교 터(遺址)만 신태인읍(新泰仁邑) 백산(栢山)의 서쪽 기슭(西麓)에 남아 있다고 전하고 있다.1)

   현재 알려진 대로 태인향교의 창건 시기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제34권 태인현(泰仁縣) 궁실조(宮室條) 객관의 기록으로 볼 때, 1421년이라는 주장이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궁실객관 정곤의 기에, “태인현은 곧 옛날의 태산과 인의 두 고을인데, 우리 조정에서 두 고을의 이름을 아울러서 태인이라 하였다. 읍내는 옛날 태산의 동쪽 구석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인의의 백성들이 왕래하는데 병통으로 여겼다. 병신년 가을 8월에 현감 황경돈(黃敬敦)이 두 고을의 중간 지점인 거산역 옛 객관을 현의 객관으로 삼았으나, 너무 좁고 누추하였다. 무술년 겨울에 오치선(吳致善)이 이어 와서 드디어 옛 객관의 서쪽에 지세를 살피고, 기해년 가을에 비로소 후청(後廳)ㆍ동서침(東西寢)ㆍ남청(南廳)ㆍ동서행랑(東西行廊)을 세우니, 모두 몇 칸이다. 신축년 여름에 안기(安起)가 오공(吳公)의 뜻을 이어받아 좌우랑(左右廊)ㆍ좌우마구[左右廐]ㆍ대문ㆍ고옥(庫屋)ㆍ향교ㆍ성전(聖殿)을 더 세우니, 모두 몇 칸이다.” 하였다.

 

  1409(태종 9, 己丑)에 두 현이 합현(合縣)이 되면서 태인현으로 개칭하였으며, 1416(태종 16, 丙申) 8월에 현감 황경돈(黃敬敦)이 새로운 치소를 두 고을의 중간 지점인 거산역(居山驛)이 있는 곳으로 옮겨 옛 객관을 현의 객관으로 삼았으나 역() 건물을 그대로 쓰다 보니 시설이 비좁고 누추하였다. 2년 후인 1418(태종 18, 戊戌) 겨울 현감 오치선(吳致善)이 거산역의 객관이 있던 곳보다 서쪽에 새로운 관청을 지을 터를 잡고, 1419(태종 19, 己亥) 가을 비로소 후청(後聽)동서침(東西寢)남청(南廳)동서행랑(東西行廊)을 세웠고, 다시 2년 후인 1421(세종 3, 辛丑) 여름에는 현감(縣監) 안기(安起)가 좌우랑(左右廊)좌우마구(左右馬廐)대문고옥(庫屋)향교성전을 세웠다.2) 이로써 유교적 관념에 입각한 지방도시의 체제를 확립하였고 향교성전을 건립하였다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태인향교는 강학(명륜당)과 제향(대성전)의 기능을 갖춘 것으로 짐작된다.

   1421년 건립 이후 태인향교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어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일부 자료에서는 태인향교가 한차례 이건(移建)하였다고 하고, 1592(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지었다고3) 하지만 구체적인 근거 자료를 제시하지 않고 있어 추가적인 검증 작업이 필요한 실정이다.

   이건(移建)과 관련된 자료를 살펴보면, 1936년에 간행된 井邑郡誌에 태인향교가 390여 년 전에 이건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4) 이것이 태인향교의 이건(移建)을 언급한 최초의 기록으로 보인다. 간행연도에 비추어 ‘390여 년 전1540년에 해당하는데5) 구체적인 근거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태인향교가 현재의 위치보다 서쪽에 처음 건립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6) 이는 지리지, 읍지류 기록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태인현의 정황을 전해주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향교가 현의 서쪽 2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7) 1656년에 간행된 동국여지지와 그 이후의 읍지들에서는 향교가 현의 서쪽 2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8) 기록상 1리의 차이를 두고 태인향교가 이건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결국 1540년대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는 기존의 자료들은 아직 단언하기 어려운 추정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 6-9> 태인향교 배치 현황9)

 

   태인향교는 옛 읍치의 북서쪽에 입지하였으며, 주산(主山)인 성황산을 등지고 남향하고 있다. 대성전이 있는 제행영역을 북쪽에 두고, 명륜당이 있는 강학영역을 남쪽에 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형식이다. 홍살문(-)10)에서 대성전에 이르는 주요 건물들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일직선의 축을 이루고 있다.

   태인향교는 크게 4부분의 영역, 즉 홍살문에서 만화루(萬化樓)까지의 진입공간, 만화루에서 명륜당을 거쳐 내삼문에 이르기까지의 강학공간(講學空間), 내삼문에서 대성전에 이르는 제향공간(祭香空間), 그리고 내삼문에서 장수재(莊修齋)가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있다.

   완만한 경사지에 입지하고 있기 때문에 각 영역들은 단차(單差)를 이루고 있고, 한식 담장으로 구획이 나뉘어 있다. 제향공간과 강학공간은 상하로 배치되었고, 장수재가 있는 공간은 그 중앙 서쪽에 배치되었다. 강학공간의 대지는 진입 부분이 좁은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다. <그림 6-9>

   태인향교의 특징은 소설위(小設位)의 규모이나 외삼문(外三門)12) 대신 문묘의 문루(門樓)인 만화루가 세워진 것이다. 만화루의 어원은 "공자지도(孔子之道) 만물화생(萬物化生)"에서 이름지어졌다. 이 만화루가 이 향교에 세워진 것은 그 유래는 확실치 않으나 왕비(王妃)나 영상(領相)이 출생한 향읍에 건립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만화루((萬化樓)가 이 향교에 세워진 것은 그 유래(由來)는 확실치 않으나 태인에는 단종왕비(端宗王妃) 정순왕후(定順王后)가 지금의 칠보면 시산리(七寶面 詩山里)에서 출생한 것과 영조대왕(英祖大王)의 생모(生母)인 숙빈(淑嬪) 최씨(崔氏)의 탄생지(誕生地)가 태인(泰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묘우(廟宇)로는 대성전과 명륜당, 만화루이며, 이외에 내삼문과 협문, 장수재, 홍살문 등이 있다. 장수재 앞에 있던 관리사는 최근 철거되었다.13) 명륜당 동쪽에는 향교 중수 관련 비석14)과 문화재 안내판이 있다. 향교를 구성하는 주요 건물 중 하나인 동서무(東西廡)과 동서재(東西齋)는 현재 없는 상태이다. 제향공간의 남동쪽 모서리 부분에는 수령을 알 수 없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식재되어 있다.15)

   규모는 대성전 26, 명륜당 23, 장수재 13, 만화루 18, 기타건물 217평으로 되어있다.

   대성전(大成殿)은 정면(正面) 세 칸(三間), 옆면 세 칸(三間)의 크기로 맞배지붕이며 처마는 홑치마이다. 기둥은 두리기둥을 사용하였으며, 기둥기초(柱礎)는 둥글게 화강암(花崗巖)으로 잘 다듬어 놓았다. 가운데는 네 짝의 널문을 달았으며, 좌우 양쪽에는 새살의 살창을 붙였다.

   명륜당(明倫堂)은 정면(正面)이 다섯 칸(五間), 옆면이 세 칸(三間)의 맞배지붕으로 된 건물이며, 좌우 양합각(兩合角)에는 방풍판(防風板)을 달았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기둥은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평면배치(平面配置)는 가운데 세칸(三間) 이 대청(大廳)이며, 좌우 양측에 각각 방() 한 개씩이 들어 있다. 대청(大廳) 앞에는 세 살의 사문합문(四門合門)을 달아 드나들도록 하였다

   지금의 향교에서는 대성전(大成殿)은 문묘(文廟: 孔子를 비롯하여 四聖 이하 中國 歷代大儒新羅 이후의 朝鮮의 큰 선비들을 함께 모신 집)이고, 명륜당(明倫堂: 조선때 (성균관)成均館에 설치되어 儒學講義하던 집)은 강의실과 같은 구실을 했으며, 동서재(東西齋)는 기숙사(寄宿舍)의 역할을 했다.

   전해 오는 유물(遺物)로는 제기(祭器), 제복(祭服), 서적(書籍) 등이 향교지(鄕校誌)와 비품(備品) 목록(目錄)에 기록되어 있다.

   이 곳에는 중국(中國) 제현(諸賢)5(五聖)과 송조(宋朝) 사현(四賢), 그리고 우리나라 18(十八賢)을 배향(配享)하고 있다.

   향교의 조직(組織)은 주(), () ()에는 교수(敎授), 500()의 군, (, )에는 훈도(訓導), 500() 미만의 현()에는 학장(學長)만 두었다.

   향교(鄕校)의 교생(校生)은 대개 15,6세의 양반(兩班)집의 아들이어야 한다.

   교과(敎科)내용은 소학(小學: 中國 宋나라때 劉子澄朱子의 지도를 받아서 편찬한 初學者用 교양서), 사서(四書: 論語, 孟子, 大學, 中庸) 오경(五經: 詩經, 書經, 周易, 禮記, 春秋)을 위주로 가르쳤다.

   군수(郡守)나 현감(縣監)은 매달 향교의 운영상황과 교생들의 성적(成績)을 도()의 감사(監司)에게 보고(報告)하면, 감사는 순시(巡視), 이를 시험(試驗)하 고 학령(學令)에 따라 상()을 주고 일강(日講), 월강(月講)에 우수한 교생(校生) 에게 호역(戶役)을 감해 준다.

   그리고 향교에서는 도의교육(道義敎育)으로 민간의 풍습(風習)을 길러 왔으며, 연중행사(年中行事)로 향음주예(鄕飮酒禮: 덕행이 있는 노인들에게 경노잔치와 같은것), 향사예(鄕射禮: 경노잔치에 활쏘기를 하는 것), 양노예(養老禮: 일반 노인 들에 대한 경노행사)을 하였다.

   향교의 운영은 국가(國家)에서 전토(田土)를 주어 운영하게 하였는데, 이 전토 (田土)를 학전(學田)이라 했다.

   학전(學田)의 크고 작은 것은 향교의 대소(大小)에 따라 달라, , (, )의 향교는 5()씩을 주었다. 향교의 재원(財源)은 이 밖에 특지가(特志家)의 희사(喜捨)와 교생(校生)들의 출연금(出捐金)으로 충당되었다.

   처음에는 이 향교(鄕校)가 매우 융성(隆盛)하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많이 불탔고, 서원(書院: 私立學校와 같음)이 일어난 뒤에는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고종(高宗) 31년 갑오경쟁(甲午競爭) 뒤에는 과거제도(科擧制度)가 없어지자 쇠퇴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교육기관(敎育機關)으로서의 힘은 없어지고, 옛 성현(聖賢)을 모시는 제사의식(祭祀儀式)만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제사(祭祀)는 봄과 가을에 두 번의 석전제(釋尊祭)를 지내고, 한 달에 두 번인 삭 망(朔 望)과 분향제(焚香祭)를 올리고 있다.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敎) 1인과 장의(掌議) 수 명이 맡고 있다.

   태인향교는 불우헌 정극인이 훈도로 재임한 곳이요, 또 현감 신 잠이 유학을 진흥시킨 본거지로 역사적인 유서를 지니고 있다.

   유학(幼學)의 전통이 깊은 고장인 탓이겠지만, 역대(歷代) 수령(守令) 가운데, 흥학(興學)에 힘쓴 사람이 많으니, 신 잠(申 潛), 고용후(高用厚), 오희길(吳希吉), 조상우(趙相愚), 이익저(李益著), 김시보(金時保), 허 후(許 逅), 유 유(柳 兪), 조 정(趙 政), 서호순(徐灝淳), 심능숙(沈能淑), 이승경 (李承敬), 박희성(朴羲性), 홍범식(洪範植) 등이 이름을 남기고 있다.16)

 

 

태인향교 건립비(泰仁鄕校 建立碑)17)

 

   공부자(孔夫子)는 만세(萬歲)의 스승으로 성교(聲敎, 성인이 덕으로 백성을 감화시키는 교육)가 중외에 차고 넘쳐 베풀어서 미치지 않은 데 없다. 무릇 혈기 있는 자로서 그를 인륜(人倫)의 지극한 것으로 종중하고 믿지 아니한 자 없다. 경술(庚戌)년 나라를 빼앗긴 후로부터 모든 것이 황폐되어 몇길 궁궐 담장도 또한 거의 풀이 우거져 덮이게 될 것이다. 전교 김상기(金相基)와 장의 여러분과 더불어 이를 탄식하며 충분히 의논하며 다행히 고을 안의 유림들의 정성을 다함에 힘입어 묘우(廟宇)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니 오도(吾道)가 하늘에서 성인에게 맡겨진 것임을 잊지 않았음을 가히 볼 수 있다. 이름을 돌에 새겨 영원히 전한다.

 

공자 탄강 2518년 정미 2월 상정(上丁)

후학 강지 김 균 근지

장의 나주 임 형 규 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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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왕희, 한국의 향교건축(문화재관리국, 1998), 242. 김호일, 한국의 향교빛깔 있는 책 들-235 (대원사, 2000), 136.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鄕校 萬化樓17(전라북도정읍시, 2012), 66. 재인용.

2) 위 본문의 이정섭(), 신증동국여지승람34권 전라도(全羅道) 태인현(泰仁縣) 궁실조 객관(한국고전변역원, 1969), 507.

3)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이후 복원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료들은 문화재청 홈페이지(태인향교 마화루)’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3, 태인향교(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74. 김호일, 한국의 향교빛깔있는 책들-235 (대원사, 2000), 136. 등이다. 재인용

4) ‘-泰仁面泰成里에잇다. 距今三百九十餘年前移建하엿고...’, 井邑郡誌, 3839. 20여 년이 지 난 1957년에 간행된 신편 정읍군지에도 같은 내용의 기록이 보인다. 재인용.

5) 1510년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는 주장이 ‘1540(중종 5)’로 잘못 표기한 것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 다. 1540년은 중종 35년이지만, 이를 참고한 자료들이 이건 연도를 중종 5년인 1510년으로 잘못 인용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1540년이란 정확한 이건 연도가 어떤 근거에 의해 나오게 되었는 지 언급하지 않고 있다. 태인향교가 1510년 이건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자료는 문화재청 홈페 이지(태인향교 만화루)’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3. 태인향교(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74. 김호일, 한국의 향교빚깔있는 책들-235 (대원사, 2000), 136. 등이다. 재인용.

6) 新增東國輿地勝覽 泰仁縣 宮室條에 의하면 이 향교는 1421(세종 3)에 건립되었으며 鄕校 在縣西三 里라는 기록으로 보아 현재의 위치보다도 서쪽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향교가 언제 현재의 자리로 이건되었는 알 수 없으며...’, 문화재대관(전라북도, 1979), 566. 재인용.

7) 鄕校 在縣西三里’, 新增東國輿地勝覽34권 태인현 학교조 향교

8) 鄕校 在縣西三里’, 東國與地志태인현 학교조 향교(1656). ‘鄕校 在邑西邊二里’, 泰仁郡 邑志학교조 향교(1789년 경). ‘鄕校 在邑西邊二里’, 湖南邑志2책 태인현 학교조 향 교(1895). ‘鄕校 在郡西二里’, 全羅北道邑志태인군 학교조 향교(1896년이후) 재인용.

9)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鄕校 萬化樓17(전라북도정읍시, 2012), 55.

10) (((궁전·관아 등의 정면 입로(入路)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 브리태니커

11) 원래 장수재 전면에 관리사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향교를 지원, 관리하는 부속공간이었던 것으 로 추정된다.

12) 대궐이나 성 따위의 문 위에 사방을 볼 수 있도록 다락처럼 지은 집.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3) 관리사는 2011년 철거되었다. 정읍시 자료 참조.

14) 비석은 泰仁文廟重修慕聖碑(1667년 건립), 士人權泰晶功績碑(1967년 건립), 泰仁鄕校保 存會記念碑(1983년 건립) 3기가 있다.

15)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鄕校 萬化樓17(전라북도정읍시, 2012), 5556.

16) 임남곤, 井邑文化財誌(井邑文化院, 1999. 12. 30), 260263.

17) 앞의 책, 263∼264.

 

 

 

태인향교 - 태인의병 유숙지

 

정의 무성서원에서 창의한 최익현(崔益鉉) 등이 유숙하며 군비를 확충했던 곳

현재주소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182-1

당시주소 전북 태인군 태인면 태성리

위치고증 - 면암선생창의전말돈헌문답기에 관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421년 창건된 태인향교는 1510년 현재의 위치고 이전한 뒤 자리는 변함이 없어 정확한 지번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상태 원형보존 상태는 훼손과 복원의 과정을 거티지는 했지만 건물의 배치 등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사적지 지정사항 전북유형문화재 제121, 전북문화재자료 제75

내용 1906년 초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최익현은 임병찬(林炳贊)에게 편지를 보내 임병찬의 뜻을 확인한 후 당시 거주하고 있던 충청남도 청양을 떠나 태인으로 향하였다. 임병찬을 제자로 받아들인 최익현은 회문산 북쪽 기슭의 상종성(上宗聖)에 약 2개월간 머물며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진행하였다.

190664일 무성서원에서 창의한 뒤 대오를 편성한 최익현 등은 곧바로 태인읍으로 들어가니 군수 손병호(孫秉浩)는 소문을 듣고 도망하였다. 태인향교에 진을 친 최익현(崔益鉉) 등은 소총 35자루와 다수의 탄환을 확보하고 군자금을 마련하는 등 군수(軍需)를 충실히 하며 후일에 대비하였다.

태인향교는 1421년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1510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으며 1592년 소실되었다가 복원하였다.

태인의병은 능주의 쌍산의소와 더불어 호남지방 중기의병의 대표적인 활동상으로 꼽을 수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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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국내 항일운동사적지 조사보고서 7 전라북도 독립운동사적지(2010. 8. 10.), 396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