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문화유적(삶의 자취)/도지정 문화재

문화재 자료 - 신잠 비

증보 태인지 2018. 3. 14. 14:26

신잠 비(申潛 碑)

 

지정종별: 문화재 자료 제105호(1984년 04 01일)

시     대: 1545년(조선 중종 39년)

소 재 지: 정읍시 태인면 태산길 3

 

 

   현감(縣監) 신잠(申潛)은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명신(名臣)이다.
   본관은 고령인(高靈人)으로 자(字)는 원량(元亮)이고 호(號)는 영천자(靈川子) 또는 아차산인(峨嵯山人)이다.

   봉례공 신주(申澍)의 손자이며 삼괴당(三魁堂) 종호(從濩)와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와의 사이에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1491년인 성종(成宗) 22년(辛亥)에 태어났다. 슬하에 1남 1녀를 낳으시니 아들이 수용(秀溶)이요 사위가 판관을 지낸 청주인 한수(韓洙)이다.
   조선중기의 문신이요 문인으로 1513년 23세 때에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시었으며 1519년(中宗 14)에 문과(文科)인 현량과에 병과 7등으로 급제(及第)하여 한림(翰林: 예문관 검열(檢閱))에 선발 되었다. 
   1521년이던 중종(中宗) 16년(辛巳)에 안처겸의 옥사(獄死)에 관련되어 장흥(長興)에 귀양 갔다가 17년만에 양주(楊州)로 옮겨 주거(住居)의 편리(便利)만은 용서받았다.

   그 후 복직되어 1543년(中宗 38년)에 등용되어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를 지내다가 1543년(中宗 38) 태인현감(泰仁縣監)으로 부임해 1549년(明宗 4) 간성군수(杆城郡守)로 갈 때 까지 6년 동안 재직하며 사부학당(四部學堂: 동․서․남․북에 세운 교육기관)을 세워 유학을 진흥시키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다가 간성(杆城) 군수(郡守)로 떠나니, 1549년(明宗 4년, 己酉)에 신잠의 어진 정치와 행적을 기리기 위해 지방 유 림(儒林)인 김 원(金 元: 道康人), 백삼귀(白三龜: 水原人) 등의 발의(發議)로 이 비(碑)가 세워진 것이다.

 

 

   그의 선정을 높이 받든 그곳 주민들이 그의 선정과 치적을 추모하기 위해 선정비(善政碑) “… 신잠(申潛)이 전에 태인 현감(泰仁縣監)으로 있을 때 누적된 폐단을 제거하고 백성들을 자식 처럼 사랑하였다. 백성들이 그의 은혜를 생각하여 부모처럼 우러렀으므로 체직되어 돌아온 후에   도 모두 사모하여 마지않다가 이민(吏民)이 함께 의논해서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다. …”, 『명종실록』 (명종 7년(1552년) 5월 11일)  


   를 건립하였다. “…태인 현감(泰仁縣監) 신잠은 고을을 다스림에 염간(廉簡)을 숭상하고 백성을 사랑하기를 자식과 같이 하였습니다. …”, 『국역 조선왕조실록』(명종 8권, 3년(1548 무신 / 명 가정(嘉靖) 27년) 5월 15일(기축) 3번째기사))

   신 잠(申 潛)은 간성군수 등을 거쳐 1553년(명종 8)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역시 그곳에도 선정을 베풀던 중 1554년 향년 64세에 목숨을 다하였다.

   장흥예양강서원(長興汭陽江書院), 태인무성서원(泰仁武成書院), 상주옥성서원(尙州玉城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에 의하면 문장에 능하고 서화를 잘하여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고 하였으며, 「패관잡기 稗官雜記」에는 특히 묵죽(墨竹)에 뛰어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연려실기술」에는 묵죽과 더불어 포도그림도 잘 그렸다고 하였다. 현재 그의 진작(眞作)으로 단정 지을 수 있는 작품은 남아 있지 않으나, 국립중앙박물관의 「탐매도(探梅圖)」와 「화조도(花鳥圖)」가 그의 작품으로 전칭되고 있다.
   그림에도 재능이 있어 난죽(蘭竹)을 잘 그렸다. 유집(遺輯)이 약간 있으며, 설중기려도 (雪中騎驢圖: 雪中探梅圖)는 유명한 그림으로 덕수궁 박물관에 보관 되어 있다.
   태인에는 이외에 신잠 선생 소상(申潛 先生 塑像: 지방 민속자료(地方民俗資料) 제4호)이 있다.


 


   1549에 건립된  비는 높은 자연석 받침돌 위에 비몸돌을 세웠는데, 비몸돌의 윗변 양 모서리를 깍아 둥글게 처리하였다. 크기는 가로 81, 세로 189, 두께 19이며, 비의 좌대(座臺)는 가로 150, 세로 92, 높이 90로 되어 있다. 선정비(善政碑)의 비문(碑文)은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이 해서로 썼으며 비액은 전서로 쓰지 않고 해서로 쓴 것이 특징이다. 지은 글이 오랜 세월의 풍우(風雨)로 닳아 없어지고 석질(石質)의 변화로 문자(文字)를 알아보기가 어려워 졌다.

   비문(碑文)은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이 지은 글이다.

 

   태인 현감 신잠 선정비(泰仁 縣監 申潛 善政碑)
 
   신태인현감선정기(申泰仁潛善政記)

 

 

 

   신잠 비문(申潛 碑文)

 

   새 그물을 치고 대밭집에 한가히 있음에 베옷에 띠 두루고 기뿐 얼굴로 자기를 소개 하면 서 보기를 원하는 두 선비가 있으니, 김태학생원과 백태학생 삼귀였다.
   우리는 태인 고을에 여러대를 살았다면서 신잠 군수의 행적을 말하였다.
   이 고을은 교통이 혼잡한 곳으로 인가는 드물되 일은 많아서 부역이 자주있고, 조세 부담 이 무겁다. 느추면 예산이 부족하고 서두르면 원망이 심하니, 둘 다 병이되는 사리를 깨닫 고, 신군수가 갑진년 상방기에 먼저 읍민의 폐해를 개혁할 법을 세우고, 읍민을 무마하며, 송사에 삼가고 자기는 엄하게 다스리며 사람을 대하는 것을 너그러이 하니, 읍민이 기꺼이 따르다.
   ‘자유가 무성군수로 읍민을 예로서 가르치니, 공자가 기뻐하시다의 명언을 본받아 이러함이 백성 다스리는 좋은 법인데 형법으로 엄하게 백성을 억누르니, 순후하고 아름다운 풍습이 드물게 되었다. 어찌 법으로만 하리오.

   학문을 일으키고 풍습을 변화시킴에 뜻을 하고 마을에 서당을 세우고, 서책을 인쇄하여 나누어 주고, 녹미를 남기여 스승을 맞아 고을의 준수한 자제를 가르치고, 고아와 과부를 구휼하며 절개와 의리를 숭상하여 염치를 갖게 하며, 순후하고 독실한 행동으로 과오를 범치 않게 하니, 호협하고 교활하던 벼슬 하는 사람들이 목을 움츠리고 마음을 고쳐 착한 행동을 하게 되어 차차 고을이 잘 다스려졌다.

   거처하는 방 벽에 청렴, 신중, 근면을 대서하여 부쳐 좋고 벼슬하는 법도는 삼으면서 동 편에 집 수 칸을 얽고 틈이 나면 군민과 더불어 거문고 치고, 시를 읊어 속세의 진애를 물리 쳤다.

   옛날 신라 말에 최문창 고운이 힘써 이 고을에 있었던 유풍이 남아 있으며, 지금도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우리 신 군수의 시문의 재주와 흉금의 지혜가 천 년 전의 최고운과 같으며, 읍민이 사랑하고 부러워함이 최고운에 뒤짐이 없다.

   신 군수의 이름은 잠이요. 자는 원양이며, 고령인으로 조선조 정승을 지낸 숙주의 증손이 며, 삼괴선생 호종의 아들로 가훈을 받들고 가업을 이었으며, 문장과 서화를 세상에서는 삼절이라고 칭송하였으니, 찾아와 배우고자 한 선비가 문 앞에 가득하였다.

   이제 관직이 만료되어 떠났으나, 군민을 다스리는 것은 교묘한 포용으로 공적이 많았다군민의 노소가 망설이지 말고 돌을 갈고 선정의 치적을 색겨 거리에 세우기로 회의 하고, 나에게 기문을 청 하였다.

   원양의 치적이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 가르쳐 한나라 벼슬을 하는 사람이 지방군수로서 정 사를 잘 함으로써 이름을 얻었다. 내가 늙고 졸렬하여 어찌 기문을 지어 여러 사람을 만족하게 하리요 만은 원양은 계유년 진사 시험에 합격한 동문생이며, 시산과 나의 집 거리가 머나 잘하는 정사를 고을 사람들이 많이 칭송하며, 또 역사들이 대서특필한 서책들이 한둘이 아니거늘 어찌 나의 글이 필요하리요 만은 두 선비와 마을 노인들의 요청을 사양치 못하고, 또 뒤에 부임할 군수에게 모범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가정기원 二十八 년 창룡기사중춘개망승전대부전의

정부좌찬성겸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오위도총관세자이양

진산 소 세 양 기

 

 

좌찬성 소세양 씀(左贊成蘇世讓記)1)


   내 시골에 살고 있었는데 찾아오는 이도 드물었다.

   하루는 대 밭 서재에 앉아 있으니 큰 옷에 넓은 띠를 한 두 유생(선비)이 찾아 왔는데 생김새가 헌칠했다.

   명함을 보니 김상상(金上庠, 進士) 원(元)과 백상상(白上庠, 進士) 삼구(三龜)이었다. 두 유생이 말하기를 우리는 대대로 태인에서 살아 왔습니다.

   우리 고을 현감 신 잠(申 潛)의 정사에 대하여 말씀 드리고 져 합니다.

   우리 고을은 교통이 번화하나 인구는 적고 일이 많으며 역사(부역)는 번거하고 부세(세금)는 많으니 느리게 다스리면 주전(음식점과 여관)이 박하고 급하게 다스리면 백성들의 원성이 일어나 모두 근심거리여서 적당히 다스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갑진년(甲辰年, 1544) 신 후(申 潛)가 현감으로 와서 부임하는 날 오랫동안 백성의 폐해를 물어서 개혁하고 민심을 무마하며 시비를 밝혀 법을 엄하게 다스리며 백성들을 친절하게 대하니 백성들이 기뻐하여 칭송하는 노래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신 후(太守, 申 潛)는 말하기를 아직 미흡하다.

   옛날 자유씨(子游氏 : 子游氏-공자의 제자. 특히 禮에 밝았음. 魯나라의 武城郡守를 지냄.)는 무성(武城) 읍재로 있을 때 예악(禮樂)으로 백성들을 가르치니 공자(孔子)도 기뻐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백성을 다스리는 좋은 법인데 후세 덕화의 정치가 통하지 않고 형벌로만 속박하여 다스림으로 순하고 아름다운 풍속을 보기가 드물게 되었다.

   내 부질없이 치도에만 얽매이겠는가? 하고 이에 학문(學問)을 일으키고 풍속을 변화하려는 뜻으로 방리(坊里)에 각각 마을 서당을 설치하고 서책을 인쇄하여 정서하게 하였으며 관곡을 풍부히 하고 마을의 준수한 자제들을 모아 스승을 데여다가 가르치고 부모를 잃은 고아와 과부들을 구조하여 절개와 예의를 숭상하고 염치심을 기르고 몸소 순수하고 돈독하게 행하여 교화의 길을 밝히니 호사하고 간활한 향리들도 움츠리고 마음을 고치지 않는 이가 없이 즐거이 선을 하게 되어 1년이 못되어 온 고을이 잘 다스려졌습니다.

   일찍이 퇴식지당(退食之堂: 자기 집)에 삼사(三事)를 편(扁)하였으니 대게 고인들의 관로(官路)의 법을 취한 것으로 오직 청(淸)과 신(愼)과 근(勤)이 있을 뿐이다 하고 세 자의 뜻을 해석하여 크게 써서 벽에 붙이고 스스로 몸을 닦고 또한 뒤에 오는 군수(郡守)들에 더욱 힘쓰게 하였습니다.

   당의 동편에 초가 수 칸을 지어놓고 틈이 있는 날에는 거문고를 올리고 즐기며 벼슬을 잊고 소연하였습니다.

   옛날 신라(新羅) 말(末) 최문창(崔文昌) 고운(孤雲)이 일찍이 우리 고을의 군수로 있을때의 치적의 여운이 지금까지 사람의 입에 오르고 있습니다.

   우리 군수의 문장과 도량을 고운(孤雲)과 더불어 천년 동안 아울러 논의 되지만 사람의 애모함과 우러러 하는 정도가 최고운도 어쩌면 신후(申侯)를 앞지르지 못할 것입니다.

   신후의 이름은 잠(潛) 자는 원량(元亮)이요 관은 고령(高靈)이니 훈상 숙주(叔舟)의 증손으로 삼괴(三槐) 선생 종호(從濩)의 아들이다.

   일찍이 정훈을 받아 가업을 이러 문장, 서․화에 능하여 세상에서는 삼절(三絶)이라 일컬어 원근에서 구하려(작품을) 찾아오는 사람이 집안에 가득하다.

   매양 공무에도 조금도 지체함이 없었으니 마치 포정(백정)이 소를 다루는데 칼 놀림처럼 척척 여유가 있었도다.

   이제 임기가 되어 돌아감에 행랑(보따리, 이삿짐)이 쓸쓸하여 휴대물과 도서가 몇 짐에 불과하였도다.

   고을의 늙은이와 젊은이가 수레를 붙잡고 이별을 못내 아쉬워했으나 이미 만류할 수가 없게 되어 돌을 다듬어 그 치적을 새겨 큰 길 거리에 세워 길이 전하고저 하오니 선생의 칭찬하는 글을 얻고자 한다며 글을 청하다.

   내 듣고 이런 일이 있었던가 하고 탄식하다. 원량(元亮)의 정사함이 이른바 덕으로써 인도하고 애로써 다스림이다.

   한(漢)나라의 공경(公卿: 三公九卿, 고위관직)이 양이천석(良二千石: 太守 良二千石-漢나라때 郡의 太守(郡守)의 봉급 年 二千石이었음.)에서 많이 나왔는데 신후(申侯)도 그런 사람인가 다만 한스러운 것은 늙고 못난이의 서투른 문장으로 어찌 제군의 소망을 채울 수 있으리오.

   그러나 원량은 계유진사(癸酉進士)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내 문생의 벗이다.

   시산(詩山: 泰仁)은 내 집에서 먼 거리에 있으나 신후의 백성에 대한 특이한 정사를 들은 지가 오래이다.

   이러한데 말 한마디 없이 가만히 있다면 도인의 선을 폐함이 아니겠는가?

   항차 사관(史官)이 붓을 잡아 역사에 쓰는 경우도 하나 둘이 아니니 어찌 나의 글을 기다리오만 우선 두 사람의 서로 하는 말을 써서 그 부모들에게 주고 또한 뒤에 오는 군수들에 규범이 되었으면 한다.

 

   가정기원 二十八 년 창룡기사중춘개망승전대부전의
   정부좌찬성겸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오위도총관세자이양
   진산 소 세 양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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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井邑文化院, 『新撰 井邑文獻錄』 (1997. 12. 25.), 86~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