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문화유적(삶의 자취)/도지정 문화재

기념물 - 서현사지

증보 태인지 2018. 3. 8. 15:50

서현사지 (西峴祠址)1)

 

지정종별: 전라북도 기념물 제48호

지 정 일: 1981년 04월 01일

소 재 지: 정읍시 태인면 서재길 13

시     대: 1819년 창건, 1868년 철거

면     적: 548㎡

 


 

<그림 >사우위비봉안도(祠宇位卑奉安圖)2)

 

 

   서현사는 1819년(순조 19)인 조선 후기에 창건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순절한 참의(參議) 박문효(朴文孝: (1568∼1593))를 향사(享祀)하여 오다가 1868년(고종 5)에 정부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의하여 훼철(毁撤)되었

으며,  열녀 진천송씨 정려(烈女 鎭川 宋氏 旌閭)와 1914년에 세워진 ‘贈吏曺參議行宗廟署直長朴公西峴遺墟碑(증이조참의행종묘서직장박공서현유허비)’가 서 있는 상태에서 1981년 4월 1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28호로 서현사지로 지정되었다.

   서현사는 1984년 국비보조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8작지붕으로 복설되었다. 1994년 강당[慕義齋]을 세웠다.

   사우(祠宇) 건물로는 현우(賢宇) 3칸 삼문(三門) 3, 정려각 2, 강당 4칸이다.

   박문효는 본관은 순천(順天)이요 자는 백원(百源)이며 운()의 아들로 중종반정에 정국1등공신(靖國一等功臣)으로 영의정을 역임한 박원종(朴元宗: 1467∼1510)의 손자로, 1590년(宣祖 23) 음관(蔭官)으로서 종묘서직장(宗廟署直長)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몽진(蒙塵)3)하자, 가동(家僮)을 거느리고 선조왕(宣祖王)을 호종(扈從)4)하여 의주(義州)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러 충성을 다하였다. 다음 해에 서울로 돌아오던 중 개성(開城) 송악산(松嶽山, 開城府에 있음.) 아래에서 적군을 만나 싸우다가 26세의 젊은 나이로 순절하였는다.

   부인 진천송씨(烈女 鎭川宋氏)는 어린자식과 종을 이끌고 시조부(媤祖父)인 박원종의 장원(莊園)5)이 있는 태인현 서촌으로 내려왔으나, 남편의 순절소식을 전해 듣고 여섯 살 난 어린 아들을 몸종에 맡기고 뒤따라 순절(殉節)하였다.

   후에 호남 유림의 상소에 의해 1817(純祖 17)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贈職)되고 부인 송씨와 함께 정려(旌閭)가 내렸졌으며, 이어 1819년에 서현사(西峴祠)를 세워 향사(享祀)했다.

   현재 서현사터에는 부인 송씨를 위해 세운 정려와 유허비가 남아있다.

   서현사에는 200년도 넘었을 십 여그루 이 상의 배롱나무가 서원을 가득 채우고 있다. 백일홍 꽃이 활짝 피는 7월부터 9월까지 백일홍 꽃잔치가 펼쳐진다. 이 배롱나무들은 모두 전라북도 보호수로 지정 되어 있다.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수종 

본수(본)

수령(년) 

수고(m) 

흉고직경

(m) 

소유자(관리인) 

관리책임자 

전라북도 보호수

9-4-24

2008년 4월 18일 고시

태인면 태서리 900 

배롱나무 

190 

6~7 

0.30~0.36 

북면 한교리 1027 박홍성

태인면장 

 

 

   서현사 중건사적 비문6)

 

 

 

   아! 선조 임진년(壬辰年), 단기 3925)의 왜구(倭寇)의 변란은 지금도 참아 말할 수 있겠는가.

   만민의 어육(魚肉)이 되고 온 세상이 토탄에 빠지며 임금이 타신 어가(御駕)가 서울을 떠나시기에 이르니 그 처참하고 혹독함이며 진실로 사느냐 죽느냐의 위급한 시기였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뜻을 가진 선비들은 창의(倡義)하여 분기(憤氣)하고 중흥(中興)하게 되니 공()도 또한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이름은 문효(文孝)요 자()는 백원(百源)이니 순천(順天) 박씨(朴氏)이다.

   고려의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정양공(貞襄公)인 영규(英規)의 후손으로 조선조의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대제학(大提學)이며, 문숙공(文肅公)인 석명(錫名)은 현조(顯祖, 유명(有明)한 선조(先祖)로써 오세조(五世祖)이다.

   보조공신(補祚功臣) 돈녕부사(敦寧府事) () 우의정(右議政) 평원군(平原君)인 거소(去疎)의 현손(玄孫)이며, 적개공신(敵愾功臣) 이조판서(吏曹判書) () 영의정(領議政) 평양군(平壤君) 소양공(昭襄公)인 중선(仲善)의 증손(曾孫)이다.

   조부(祖父)의 이름은 원종(元宗)이니 정국공신(靖國功臣) 영의정(領議政)이요 시호(諡號)는 충열(忠烈)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운()이니 대호군(大護軍)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이다.

   어머니의 정부인 평산신씨(平山申氏)이니 선조조(宣祖朝) 무진년(戊辰年, 단기 3901)에 공()을 낳았다.

   공은 교목세신(喬木世臣, 여러 대를 높은 지위에 있어 국가의 운명에 자기의 운명을 위탁하는 신하)으로써 나라와 더불어 휴척(休戚, 평안함과 근심 걱정)을 같이 하는 처지여서 조정에서 직무를 성실히 행하니 종묘서직장(宗廟署直長)에 제수(除授)되어 있던 차 임진왜란을 당하니 수도인 서울을 지키지 못하게 되어 종묘(宗廟社稷)에 위험이 절박하니 피눈물을 머금고 국은(國恩)에 보답할 것을 맹서하면서 드디어 사당(祠堂)에 고()하고 아내와 결별한 수 장정을 거느리고 어가(御駕)에 호종(扈從, 임금님의 거둥에 따름)하여 호위와 방호(防護)에 정성을 다하였다.

   이듬해 계사(癸巳, 단기 3926)년에 서울에 돌아오는 길에 개성(開城)에 이르러 적()을 만나 크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이는 나의 깊은 원수다 어찌 일보(一步)라도 물러가 구차히 살기를 도모할가 보냐 분연히 앞서 나아가 말을 달려 적 수십 명을 베고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순국(殉國)하니 때의 나이 26세라.

   어찌 그리 용맹하며 어찌 그리 장렬한가 그 사적이 용만일기(龍彎日記)에 실려 있다.

   부인(夫人) 송씨(宋氏)는 공()이 전쟁터에 나간 후로부터 남기 고간 부탁을 저버리지 않고 어린 아들과 늙은 여비(女婢)에게 고아(孤兒)를 부탁하며 잘 보호하여 뒤를 이르게 하고 통렬히 슬퍼하며 남편(男便)에 뒤를 쫓아 죽으니 이 일이 조정에 들리어 정려(旌閭)를 세웠다.

   공()에게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증직(贈職)하였다.

   순조조(純祖朝) 병자(丙子, 단기 4149)년에 사림(士林)들이 병현(丙峴)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추모(追慕)하는 전후에 공사조야(公私朝野)가 충성과 공훈을 포양(褒揚)함이 가벼이 하지 않도록 하는데 불행히도 중간에 나라의 금령으로 훼철(毁撤)하게 되니 한()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을축(乙丑, 단기 4318)년 봄에 유림(儒林)들의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 중건(重建)하기로 계책을 합의하고 문화재비(文化財費)로 거액(巨額)을 얻어 오량(五梁) 삼칸(三間)으로 이루어지니 장대하고 아름다워 건물이 튼튼하며 창문은 밝고 깨끗하고 또한 이를 화사하게 단청(丹靑)하며 이를 호위하게 대문과 담장을 하니 한층 휘황하여 주변의 시내와 산이 광채를 더하였다.

   길()한 날과 좋은 시()를 가려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제례(祭禮)를 갖추어 이르니 원근의 선비들이 운집(雲集)하여 사기(士氣)가 장차 떨칠 터이니 진실로 쇠퇴한 세상에 성대한 경사라 이를 만하다.

   이미 그 전말(顚末)을 갖추기 위하여 비()를 세워 사적(事蹟)을 새기려고 본손(本孫)인 선규(渲圭)와 유생(儒生)인 고광준(高光準)이 같이 와서 비문(碑文)을 청하여 말하기를 이 공사는 여러 해의 경영으로 되어 다시 향사(享祀)하게 한 것은 혜동(惠東)과 병규(炳圭)이다.

   이제에 이르러 홀로 비석(碑石) 세운 일을 담당한 이는 대규(大圭)이다.

   이 또한 시범으로써 기록한다. 내가 듣고서 이를 생각하니 오직 참의공(參議公)이 적()을 토벌하고 나라를 일으킨 굳센 충성이 있었으므로 이어서 그 아내가 남편을 따라 집을 보전하는 정렬(貞烈)이 있었다.

또 이 모든 자손은 선조를 받들고 생각하는 지극한 효성이 있어 이에 충()과 효()와 열()의 삼강(三綱)이 일문(一門)에 모두 빛나는 천고(千古)에 짝이 드므니 어찌 거룩하다고 하지 않겠느냐.

   이로 인하여 참의(參議公)은 당일에 몸으로 가르친 덕은 법도를 보여 교화되고 자손을 위하여 남긴 계책으로 소중하여 우러르게 된다.

   감탄을 이기지 못하여 위와 같이 이를 써서 유가(儒家)로 하여금 이를 본 삼아 이 사우(祠宇)를 출입하는 이는 다만 제향(祭享) 올리는 데에만 능()알 것이 아니라 삼강의 큰 윤리(倫理)의 본지(本旨)를 강명(講明)케 하는 까닭을 안즉 이 사묘(祠廟)의 존중(尊重)함이 말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있을 터이니 아름다운 풍속을 세움에 도움이 있어 세상을 돕는 만분지일이라도 되기를 바란다.

 

을축년 청화절

                                                                      단기 4218년 을축 4월 일

부안 김 동 관(金烔觀) ()

장흥 고 광 준(高光準) ()

 

 

<증이조참의행종묘서직장박공서현사유허비(贈吏曺參議行宗廟署直長朴公西峴祠遺墟碑)-앞면>

 

 

<면면증이조참의행종묘서직장박공서현유허비(贈吏曺參議行宗廟署直長朴公西峴遺墟碑)-뒤면>

 

 

   증 이조참의 행종요서직장 박공 서현사유허비명(贈 吏曺參議 行宗廟署直長 朴公 西峴祠遺墟碑銘)7)

 

   임진왜란에 팔도의 웅호(熊虎)같은 사나움으로 각각 충성과 용기로써 적과 싸워 순절하고 적개심을 불태워 적과 대항하여 공훈록에 기록되고 포상(褒賞)됨이 나라에서 내린 융숭한 보답이다.

   공의 이름()은 문효(文孝)요 자()는 백원(百源)이니 순천인(順天人)이다.

   고려 삼중대광(三重大匡) 정양공(貞襄公)인 영규(英規)는 상조(上祖, 먼 웃대의 조상)가 되고 조선조에 들어와서 좌명공신(佐命功臣)이요 문숙공(文肅公)인 이름()이 석명(錫名)의 오세 손이다.

   할아버지인 원종(元宗)은 정국공신(靖國功臣)이요 영의정(領議政)이며 충열공(忠烈公)인 아버지의 이름은 운()이며 이는 대호군(大護軍)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다.

   어머니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진사(進士)의 딸이며 무진(戊辰, 단기 3901)년에 공()을 낳았다.

   선조조(宣祖朝) 경인(庚寅, 단기 3923)년에 공()은 음직(陰職)으로 종묘서 직장(宗廟署 直長)을 지내다가 임진왜란을 당하여 어가(御駕)가 장차 용만(龍彎, 평안북도 의주의 옛 이름)으로 파천(播遷, 임금이 난을 피해 도성을 떠남)하려 할 때 공()은 스스로 충의심에 분기하여 나라에 몸을 바칠 것을 맹서하고 곡()하며 선조(先祖)의 사당(祠堂)에 고()하고 부인 송씨(宋氏)와 결별하며 말하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국은을 입어 그 만분지일이라고 갚기를 도모하지 못하고 국운의 불행을 만났으니 사직(司直)은 위험이 박두되고 임금께서 몽진(蒙塵, 임금님이 난리를 피하여 멀리 떠남)하게 되었으므로 신자(臣子)의 목숨을 바칠 날이요 내가 가면 죽은 곳은 알 수 없을 것이요. 다행히 어린 자식이 있으니 잘 길러서 대를 이으시오.”하고 가동(家童, 집안의 남자 종) 약간을 거느리고 호위하는 말씀을 다 하였다.

   이듬해 서울로 돌아오는데 개성에서 졸연히 적병을 만나니 공()은 꾸짖고 굴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죽음에 그 곳을 얻음이라하고 분연히 말을 타고 진격하여 수명의 목을 베었으나 몸에도 또한 화살을 맞아 부상하여 전몰하니 계사(癸巳, 단기 3926)년 어느 날이며 26세가 되던 해이다.

   이 사실이 용만일기(龍彎日記)에 실리기를 꽃다운 나이에 지위 낮은 관원으로 능히 장하였도다. 그 대도(大道)!

   곧 행재소(行在所)의 임금께 들리어 이조참의(吏曹參議)의 증직(贈職)을 내리고 양주(楊州)의 도산(陶山)의 언덕 자좌원(子坐原)에 장사지냈다.

   옆에는 증() 숙부인(淑夫人) 진천(鎭川) 송씨(宋氏)이니, 진사 만필(萬弼)의 딸이다.

 

   삼종지의(三從之義)는 무겁다 하물며 사육신(死六臣, 여기서는 박팽년을 말함)과 당내간(堂內間, 8촌 이내의 일가 사이)으로 가화(家禍)가 해소되지도 못하였는데!

   한 사람의 늙은 여비(女婢)와 여섯 살 난 아이를 거느리고 험한 길을 고생하며 남쪽으로 내려와 태인현(泰仁縣)의 서촌(西村)에 이르러 살게 되었다. 여기는 별세한 상공(相公, 여기서는 그의 시조부인 원종(元宗)을 가르킴.)이 도조(賭租)를 받던 농막(農幕)이다.

   외롭고 멀리 떨어져 있는데 홀연히 공()의 왜적에게 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 자결하려고 늙은 여비(女婢)에게 어린 아이들을 부탁하고 조용히 의()를 취하여 죽음을 택하여 능히 적절함에 이르다.

   그 사행(事行)을 상고(上考)하면 백희(伯姬, 춘추(春秋)시대에 송()나리 공공(公共)의 부인(夫人))로 하여금 이를 감당케 하여도 처신하는 바가 아마도 이를 쉽다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에 길이 막혀 공()의 묘() 가까이에 안장하지 못하고, 정읍의 북쪽 대곡(臺谷)의 목과동(木果洞)의 병좌원(丙坐原)에 장사(葬事)를 지냈다.

   아들 충기(忠器)기 점차 자라서 대대로 이어온 가업(家業)을 다시 정비하였다.

   그의 아들 예호(禮浩)는 두 아들을 두어 맏이는 사인(師仁)이니 벼슬이 장악원정(掌樂院正)이다.

   다음은 사의(師義)이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다. 후손이 번성(繁盛)하여 모두 적어 놓을 수 없다.

공론(公論)이 그 사실을 포상(褒賞)하고 서현(西峴)에 사우(祠宇)를 짓도록 하고 그 정렬(貞烈)을 현창(顯彰)하도록 정려(旌閭)를 세우게 하니 그 은전(恩典)이 지극하였다.

   그 후 나라 법으로 사우(祠宇)를 헐어 버리고 그 터에 묻어 놓았다.

   정려(旌閭)의 후손 중의 열부(烈婦) 허씨(許氏)와 열부(烈婦) 이씨(李氏)를 그것에 정려(旌閭)를 세우니 세 정려(旌閭)가 단청(丹靑)을 하여 나란히 빛나고 벽()의 장식도 다시 새로워졌다.

   단()에 비()를 세우니 그 책임을 맡아서 한 이는 해선(海善)과 노수(魯洙)이다. 그 모범됨을 징빙(徵聘)함이 없을 수 없어 나에게 그 기록을 청함으로 문자를 맡을 만한 사림이 못되나 마음으로 흠모(欽慕)하는 바이기에 병()을 견디며 서()하고 명()하여 말하기를 용만(龍彎)의 한 떳떳한 일은 무부(武夫)로도 섬뜩하였네. 형세 핍박하여 빈주(邠州, 중국 땅 이름 여기에서는 서울을 말함.)를 떠나니 용약 마땅히 기양(岐陽, 중국 땅 이름 여기에서는 용만(龍彎)을 말함.)으로 가야지. 마침내는 군사들이 선비를 청하여 나이 윗사람도 그를 장() 삼았네. 은혜로운 내려짐은 이조참의의 증직이요, 역사에는 적히어 길이 전하리. 개성에서의 충성된 혼백은 도산 기슭에 영원토록 모셨네. 그의 부인 남편을 뒤따라 죽으니, 꼿꼿하고 열렬한 빛을 발하고 있네. 정려(旌閭) 세우기를 나라에서 명()하니, 융숭한 보답으로 현창(顯彰)되었네. 늙은 여비(女婢)에게 고아(孤兒)를 부탁하니 내 아끼던 종이니 잊을 수 있도다. 넘어진 나무에서 싹이 돋으니, 더욱 더욱 창성(昌盛)하였도다. 신령(神靈)한 지초(芝草)는 뿌리가 있어, 세상을 삼강(三綱)의 시범으로 구제하였네. 한 조각 빗돌[碑石]에는 큰 글씨 새겨져 번쩍 번쩍하네. 태인의 서현(西峴)에는 낙일(落日)에도 창창하네. 갈아도 부러지지 않으니, 떨어진 눈물 줄줄 흐르네.”

 

 

갑신(甲申, 단기 4277)7월 일.

진사(進士) 전의(全義) 이 병 하(李炳夏) ()

 

 

 

<열부 경주이씨지비(烈婦 慶州李氏之碑) - 앞면>

 

<열부 경주이씨지비(烈婦 慶州李氏之碑) - 뒷면>

 

<열녀 학생 박태운 처 태산허씨 지려(烈女 學生 朴泰運 妻鎭 泰山許氏 之閭 - 왼쪽), 열녀 진천송씨 정려(烈女 鎭川 宋氏 旌閭 - 오른쪽)

 

열녀 학생 박태운 처 태산허씨 지려(烈女 學生 朴泰運 妻鎭 泰山許氏 之閭)8)

 

태인면 태서리 서재마을 서현사지(西峴祠址) 안에 있으며 정려는 막돌기단부위에 석주형 초석을 놓고 민흘림기둥을 세운 정면 1, 측면 1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인 보호각 안에 있으며 정판(旌板)에는 열녀 학생 박태운 처 태산허씨 지려(烈女 學生 朴泰運 妻鎭 泰山許氏 之閭) 성상(聖上) 6년 병인(丙寅) 3월 일 특명정려(特命旌閭)“라 기록되어있다. 비각(碑閣)은 팔작지붕으로 홑처마이며 규모가 220cm×195cm이다.

 

<열녀 학생 박태운 처 태산허씨 지려 현판(烈女 學生 朴泰運 妻鎭 泰山許氏 之閭 懸板)>

 

 

열녀 진천송씨 정려(烈女 鎭川 宋氏 旌閭)9)

 

태인면 태서리 서재마을 서현사지(西峴祠址) 안에 있으며 비각(碑閣)은 팔작지붕으로 홑처마이며 규모가 220cm×195cm이다. 정려각(旌閭閣) 안의 정판(旌板)에는 열녀 증 통정대부이조참의 행 중직대부종묘서직장 박문효 처 증 숙부인진천송씨 지려(烈女 贈 通政大夫吏曹參議 行 中直大夫宗廟署直長 朴文孝 妻 贈 淑夫人鎭川宋氏 之閭), 성상(聖上) 병자(丙子) 12월 일 명정려(命旌閭)“라 새겼다. 기문(記文)”1829(승정기원 후 4) 정축(丁丑) 상완(上浣) 풍양(豐壤) 조종영(趙鐘永) ()“라고 쓰여 있다.

 

<열녀 진천송씨 정려 현판(烈女 鎭川 宋氏 旌閭 懸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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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全北文化財大觀 , 井邑地方文化財地表調査報告書

2) 崔玄植編, 井邑院祠錄(1996. 12. 30.), 120.

3) 머리 먼지 쓴다는 으로, 임금 난리 피하여 안전한 으로 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

4) 임금의 거가(車駕)를 모시고 따라가는 것, 또는 그 사람

5) 조선 중후기에는 16~17세기 양란(왜란, 호란)이후 인구가 줄어들고 개간이 되지 않은 황무지가 많아졌으나 재지양반(내지는 향촌양반)에 의해 간척지와 황무지의 개간이 주도되면서 다시금 장원인 농장이 생겨났다. 양반의 농장은 주로 전호(佃戶)인 노비나 양인들에 의해 경작되었는데, 그중 노예인 노비가 양인 못지않게 인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노비는 크게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나뉘는데, 오희문이 <쇄미록>에 노비를 묘사한 바에 의하면, 자기 집과 논밭을 따로 가지고 양반지주의 농장을 경작하여 주는 외거노비가 가장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무위키]

6) 임남곤, 井邑文化財誌(井邑文化院, 1999. 12. 30), 193196.

7) 앞의 책, 196∼199.

8), 9) 정읍의 정려(旌閭) (정읍문화원, 2009. 9. 30.), 92.

        全北旌閭忠孝烈碑 (2000. 2. 28), 3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