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문화유적(삶의 자취)/도지정 문화재

유형문화재 - 태인향교 만화루

증보 태인지 2018. 3. 6. 15:54

태인향교 만화루(萬化樓)

 

지정종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1

지정년월일: 1986년 09월 08

소   재   지: 정읍시 태인면 향교2길 49-1

         대: 조선후기 추정

규         모: 정면 4, 측면 2, 중층, 팔작지붕

 

   향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만화루는 외삼문(外三門)을 격에 맞지 않게 번듯한 누문으로 대신하는 만화루가 세워진 것인데, 만화루는 문묘(文廟)의 문루(門樓), 그 어원(語源)공자지도(孔子之道) 만물화생(萬物化生)’에서 따온 것으로 공자의 도로 만물을 교화 한다라는 뜻이다. 공자가 밝힌 길을 통해 우주 만물에 대한 이치(理致)와 도리(道理), 윤리(倫理)를 터득하고자 했던 선비들의 마음가짐이 드러난다. 이러한 당호(堂號)는 주로 전라도 지역에서 사용된다. 태인현과 같은 작은 고을에 만화루가 건립된 이유를 황실과 관련지어 언급하기도 하지만 근거가 없다. 언제부터 향교에 누각이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기록상 고려 말부터 향교 누각의 존재가 확인된다. 향교의 누각은 고려 때 성행하던 여름 공부(夏課)를 하기 위해 건립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까지는 현감 조항진(趙恒鎭)이 정사(丁巳)년에 만화루 정면에 걸려 있는 편액(扁額)을 쓴 사실을 근거로 1797(정조 21)에 건립하였을 것으로 추정(推定)할 뿐이다. 만화루 편액에는 歲丁巳仲夏耐翁書라는 작은 글씨와 함께 趙恒鎭印이라는 낙관이 새겨져 있다. 조항진은 17946월 임기를 마치고 돌아갔으므로 편액(扁額)에 쓰인 정사년(丁巳年)은 재임(在任) 연대를 환산(換算)한다면, 부임(赴任)한지 4년째인 1797(정조 21)에 해당한다.

   현감 조항진이 태인현에 부임하여 1797년에 향교 누각의 편액을 썼다고 해서 기존의 추정대로 이때 만화루를 건립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조항진은 현감 재임 시 유상대(流觴臺)를 보수하고 만화루와 피향정(披香亭)의 편액도 썼다. 피향정 편액은 임기를 마치고 두 달 전인 17994월에 썼는데, 이때 피향정을 중건(重建)했다거나 수리(修理)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만화루의 경우에도 편액을 쓴 사실과 건물의 중건 또는 수리 여부를 연관 지을 만한 정황은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조항진이 쓴 편액으로 인하여 만화루가 최소한 1797년 이전에 건립되었다는 사실만 확인시켜 줄 뿐이다.

   태인현의 모습이 나타나는 옛 지도를 살펴보면, 조항진이 편액을 쓰기 이전에 이미 만화루가 건립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태인현의 옛 지도 5점 정도이며, 이 중에서 향교에 만화루가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지도는 4점이다.

 

<그림 6-10> 비변사인방안지고 호남지도

17391750년 추정, 규장각 12155

 

<그림 6-11> 해동지도

1750년대 초, 규장각 古大4709-4112155

 

<그림 6-12> 여지도

17361767년 추정, 규장각 4790-68

 

<그림 6-13> 지승

17761786년 추정, 규장각 15423

 

   먼저 17391750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 方眼地圖) 호남 지도(湖南地圖)에는 두 동의 건물로 표현되어 있고 각각 鄕校萬化樓로 표기되어 있다. 만화루는 단층 건물로 표현되어 있는데, 피향정이 중층 건물로 표현된 것과 대조적이다. 당시 만화루가 단층 건물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간략하게 표현된 결과인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만화루의 존재는 확인할 수 있는 지도이다. <그림 6-10>

   1750년대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해동지도(海東地圖)17361767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여지도(輿地圖), 그리고 17761786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지승((地乘)에 표현된 태인향교의 모습은 동일하다. 향교는 두 건물로 표현되어 있고 개개의 건물 명칭은 생략된 채 전체를 鄕校라 표기하고 있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비변사인방안지도 호남지도와는 달리 만화루로 추정되는 전면의 건물이 중층 건물로 묘사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피향정과 함께 만화루도 중층 건물로 묘사된 것을 보면 지금과 같은 중층건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의궤와 같이 정확하게 건물을 묘사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겠지만, 지도에 누각 형식의 건물로 묘사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태인향교의 만화루는 적어도 18세기 중엽에 중층 형식의 건물로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태인현감 조항진이 편액을 쓴 1797년 보다 조금 앞서는 시기로 추정되기 때문에, 편액과 만화루가 동시대의 산물이라는 기존의 주장은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림 6-11, 12, 13>

   한편 현재와 같은 만화루의 모습이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과 같은 모습의 만화루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간행된 井邑郡誌가 최초이다. 4×2칸의 평면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문지방(門地枋)의 형태로 미루어 지금과 같이 아래 층 가운데 2칸에 문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와 같이 계자난간(鷄子欄干)으로 되어 있지 않고 간단하게 살대로만 엮은 평난간(平欄干)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 차이점이다.

   향교 누각의 정면칸수는 대부분 3칸 또는 5칸인 것이 일반적이다. 태인향교의 만화루와 같이 정면 4칸을 취하는 경우는 경북 군위 의흥 향교의 광풍루(光風樓) 정도만 알려질 정도로 극히 이례적이다. 정면 칸수를 4칸으로 하였을 경우 삼문(三門)의 형식을 취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의 향교 누각에서는 이러한 평면 규모를 채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인향교의 누각을 4칸으로 계획한 의도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어렵다. 추후 이에 대한 세심한 고찰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정면 4, 측면 2칸으로, 지붕 측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겹처마 팔작지붕의 익공(翼工) 집으로, 화강석(花崗石)의 바른 층 쌓기의 기단(基壇)의 중앙 부분을 끊어, 장대석(長臺石)으로 넓은 계단을 설치한 점이 특이하다. 초석은 커다란 자연석을 사용한 점이 특이하며, 더욱이 정면을 짝수 칸으로 하여 아래층에는 4칸 중 중앙의 2칸에 태극문양이 그려진 향교의 출입문을 만들고, 나머지 2칸은 판벽(板壁)으로 막았으며 위층에 만화루라는 누()를 구성하였다. 태인향교의 만화루와 같이 출입문을 두 곳으로 나누어 낸 것과 옆을 판벽으로 처리하는 경우는 다른 건물에서 아주 보기 힘든 모습이다. 평지에 어울리는 누각을 만드는 황금비율을 찾는 과정에서 키는 낮추고 품을 넓혀 그리 디자인된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누는 사방으로 터져 있으며 마루 주위에 난간을 돌렸던 것 같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고개를 숙이고 키 낮은 문에 들어서면 누각을 떠받친 우람한 붉은 누하주(樓下柱)들 사이로 오른쪽 끝에 누각으로 오르고 좁고 가파른 계단이 보인다. 기둥과 주초들은 저마다 제각각으로 생겨서 그 다양한 생김새에 호감이 간다. 어느 기둥 하나 못생긴 것을 찾을 수 없다. 저마다 자기 생김 그대로 자기의 일은 누각을 떠받치는 것임을 잘 알고 있는 듯 튼실하다. 계단을 오르면 기둥들은 모두 붉은 색이고 대들보와 서까래들은 죄다 푸른색이다. 누각 안에는 아무런 치장도 되어 있지 않고, 다만 커다란 푸른 용과 붉은 용 2마리가 입안에 여의주를 물고 뭔가에 놀란 듯 퉁방울눈을 부릅뜬 채 재미있는 표정으로 마주보며 대들보 위에 턱 걸치고 아랫도리는 용트림을 하고 있는 모습이 유쾌하다. 대개 용에게서 풍기는 위엄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누각 한 풍경은 심각하고 진지한 것을 벼르고 올라왔다가 뜬금없이 우스운 장면을 맞다드린 듯 유쾌하다. 푸른 용과 붉은 용이 입안에 여의주를 물고 뭔가에 놀란 듯 퉁방울눈을 부릅뜬 채 유머러스한 표정으로 마주 보고 있다. 대개 용에게서 풍기는 위엄은 찾아볼래야 볼 수가 없다. 이렇듯 해학적인 용을 보니, 독서삼매에 빠졌던 학생들이 만화루에서 용들을 희롱하며 머리를 식히는 모습이 떠오른다.

   만화루는 1984년 해체보수를 시행하였다. 그 이전에는 부분 번와(翻瓦) 공사(工事) 정도가 1976년에 있었던 것으로 전할 뿐이다. 지정 이후에는 1997년 번와 공사를 시행하였고 1998년에는 기단을 보수하였다. 2000년에는 계자난간을 설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