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편 성씨와 인물(삶의 주체)/태인의 성씨

태인 백씨(泰仁 白氏)

증보 태인지 2018. 3. 23. 22:34

태인 백씨(泰仁 白氏)

 

 

   시조 백우경(白宇經)백씨대동보(白氏大同譜)에 따르면 중국 고대의 전설 속의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 16세손 백을병(白乙丙)의 후손으로 중국 소주(蘇州)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첨의사(僉議事)와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으나 간신(奸臣)들의 모함을 받아 780(선덕여왕 1) 신라에 건너와 자옥산(紫玉山 : 지금 경주시 안강읍 옥산동) 밑에 정착한 후 영월당(迎月堂) 만세암(萬歲庵)을 짓고 학문보급에 진력하였다고 한다. 태인백씨(泰仁白氏) 시조 백석순(白碩淳)은 조선시대에 사과(司果)를 지냈다고 한다. 문헌이 전하지 않아 세계를 알 수 없다.

 

   태인 백씨(泰仁白氏)의 시조 백석순(白碩淳, 石淳)은 조선시대 초기에 사과(司果)를 지냈다고 한다. 귀시(貴時)의 아들로 간미(簡美)5자 경신(景臣)의 후손이다. 태인 백씨(泰仁白氏)는 해미 백씨에서 분적하였다.1), 또는 수원백씨(水原白氏)에서 분적한 성씨이다.2)

 

   조선조 초에 석순의 조부인 녹승(祿承)이 정언(正言)을 지내고 해미(海美)에서 태인(泰仁)으로 이거하여 태인을 본관으로 삼았다. 석순은 의주(義州)로 서천(西遷)하여 후손들이 주로 의주에 대대로 세거하였다. 석순의 손자 용서(龍瑞)는 임란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통훈(通訓) 증호참(贈戶參)이며, 증손인 거간(居簡)의 아들 광종(光宗)과 거의(居易)의 아들 광조(光祖)가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때 공을 세우고 모두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태인 백씨는 조선조 들어서 창관된 성씨로서는 매우 많은 무인들을 배출한 무관 집안이다.

   주요 세거지는 의주군 고성면 대산동 (義州郡 古城面 坮山洞)4)

 

   주요 인물로는

백광언(白光彦, 1554~ 1592) 조선 중기 무신

   백사림(白士霖, ? ~ ? ) 광언의 동생. 임진왜란 때 김해부사

   백용서(白龍瑞, 1556~ ? ) 임란 호성공신(扈聖功臣), 통훈(通訓) 증호참(贈戶參)

   백광종(白光宗, 1591~ 1671) 아이진첨사(阿耳鎭僉使)

   백광조(白光祖, 1602~ 1677) 미곶첨사(彌串僉使)

   백관묵(白寬默, 1804~ 1866) 태천 진사(進士)[2]

   백철(白鐵, 1906~ 1985) 본명 백세철(白世哲) 문학평론가, 교육자

   백행인(白行寅, 1915~ ?) :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백상건(白尙健, 1918~ ?) : 중앙대학교 정경대 교수

   백행걸(白行傑, 1932~ ?) : 12보병 사단장, 코엑스 이사장

 

   과거급제자는

   무과 - 백광척(白光倜) 백형길(白亨吉) 백시엽(白時燁)

   진사 - 백관묵(白寬默)

 

   인구수는 1985년에는 총 120가구 467명,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태인 백씨는 156가구 총 485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3) 2015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태인 백씨는 총 1,228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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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키백과

2), 3) [네이버 지식백과] 태인백씨 [泰仁白氏] (성씨와 본관, 2011. 1. 14., 한국학중앙연구원)

4) 『성씨와 본관』(한국학중앙연구원, 2011. 1. 14.)  http://www.aks.ac.kr 

   『한국인의 성보(姓譜)』 (삼안문화사, 1986년)

   『성씨(姓氏)의 고향』 (중앙일보사, 2002년)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전통족보문화사(傳統族譜文化社)』 (http://www.genealog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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