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절 고대의 취락
취락은 인간들이 땅을 점유하면서 만들어 낸 생활공간 중 하나이다. 취락은 거주하고 있는 인구수나 사람들의 직업과 기능 및 경관의 차이에 따라 촌락과 도시로 구분된다. 또한 촌락은 위치, 가옥 구조, 형태 등에서 지역마다 독특한 경관을 나타낸다. 따라서 고대의 취락은 주거공간의 변화를 중심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1. 구석기 시대의 주거
수렵생활을 하며 자연동굴이나 바위 밑을 이용하여 비와 바람을 피하며 잠을 자는 일시적 은신처로 사용하였다. 그 후 원시인들은 삶의 경험을 지식으로 나뭇가지를 모아서 원추형으로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다 나뭇잎이나 수피 등을 덮어서 만든 원시 원형주거가 처음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2. 신석기 시대의 주거
신석기 시대는 빙하기의 오랜 유랑생활을 끝내고 한 곳에서 가축을 기르고 식량을 생산하며, 집단노동으로 공동생활을 시작한 시기로 보고 있다. 신석기 시대는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눌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B.C. 4,000년경부터 한반도 남쪽 바닷가나 한강, 동해안 지역에서 생활했던 유적이 발굴되고 있다.
그리고 중기의 대표적인 주거지로서 서울 암사동 유적이 있다. 암사동 주거지는 지표면 아래를 약 1m 이상 파낸 반 지하 수혈주거이다. 집터는 원형에서 말각방형, 타원형 또는 방형으로 바뀌었고, 말기에 이르러 장방형이 출현하고 있다.
사람의 생활상이 발전됨에 따라 기후가 좋고 물이 많은 곳으로 이동하여 정착함으로써 본격적인 농경문화가 시작되었으며, 그 지방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여 집을 짓는 방법이 발전되기 시작했다.
3. 청동기 시대의 주거
청동기와 철기가 병용되는 초기 철기시대의 주거지는 나지막한 구릉지의 경사면에 적게는 10~20여 호, 많게는 100호 정도 되는 큰 취락을 형성하면서 농경을 주업으로 어로나 목축 등으로 생활해 왔다. 주거지는 대개 방형이나 장방형으로 집터가 큰 것은 3.7×15.7m로 대형화되었으며 기거, 취사, 작업, 저장 등으로 규모를 나누는 벽체가 생기고, 서까래가 지면에 닿지 않는 구조로까지 발전되었다.
4. 고조선 시대의 주거
고조선은 B.C. 2,333년 단군이 조선을 세웠다는 신화시대로부터 중국 은나라 말 (B.C. 11세기) 무왕 때 조선후로 봉해졌다는 기자(箕子)의 조선을 거쳐, B.C. 194년에 연나라로부터 조선에서 왕이 되었다는 위만이 조선에 한사군을 설치한, B.C. 108년까지 걸친 장장 2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명멸했던 여러 고대사회의 총칭이다. 고고학적으로는 청동기 이후부터를 고대 국가 시대로 간주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고문헌인 중국의 후한서, 삼국지, 진서 등에 의하면 이 시기에는 움집, 귀틀집, 고상주거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 움집(土室)
『후한서(後限書)』 동이전(東夷傳) 읍루조(邑樓條)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각 마을마다 대인이 질서를 유지한 것을 알 수 있으며 무척 추워서 혈거에서 생활하였으며, 움의 깊이가 깊은 것일수록 귀하였고, 큰 움집은 그 깊이가 사닥다리로 아홉 단(약1.5m~1.8m)을 내려가야 이를 수 있었다. 사람은 냄새가 나고 불결하였으며, 변소는 집들이 둘러있는 중앙에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읍루가 연해주 지방에서 송화강 유역에 걸쳐 있으므로 북쪽의 추운 지방에서는 혈거가 깊을수록 귀했으나, 남쪽의 따뜻한 지방으로 내려올수록 깊이는 얕아서 전남 장천리의 유구에서는 주거지 7개가 모두 다 15~30cm 정도의 깊이였다. 이상과 같이 주거는 결국 지하를 깊게 파고 기둥을 세워 도리와 보를 낸 후 여기에 서까래를 지면으로부터 걸쳐 지붕을 짜고 잔나뭇가지와 풀, 흙 등으로 덮은 수혈 주거가 만들어졌으며, 나중에는 규모가 점차 커지고 공간분화가 이루어지면서 기둥과 벽체를 세우고 실내 구조가 복잡해지며 지붕이 땅에서 떨어지는 반 움집의 형태가 생겨났다. 이때 비로소 여자는 안쪽 깊은 곳을 차지하고 중간은 작업 공간, 입구 쪽은 야외 생활 도구 및 남성의 공간으로 분리되어 사용했다.
나. 귀틀집(牢獄)
귀틀집은 무주 구천동, 강원도, 울릉도 나리분지, 함경도의 산간 지방과 지리산이나 강원도의 화전민들이 짓고 살던 집으로서 통나무를 우물 정자(井) 형태로 쌓고 통나무와 통나무 사이의 틈에는 진흙으로 막아 벽체를 이룬 집을 말한다. 후한서 동이전 부여국조,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에 보면 뇌옥(牢獄) 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집을 만드는데 나무를 횡으로 쌓아 교도소와 유사하게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추운 겨울에도 사용할 수 있었던 일상 주거라기보다는 창고였거나 고상식으로 지은 여름철 주거였을 가능성도 많다.
다. 고상주거
고상주거라는 것은 집의 바닥이 높게 만들어진 누각이나 원두막과 같은 주거를 말한다. 고상주거의 존재는 고구려의 마선구 제1호 고분벽화나 신라시대 가형토기에서 높직한 바닥을 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고상주거의 존재를 인정하나 일부 학자들은 고상주거를 일상생활 주거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편 마한 지방에는 여름에 비가 많이 오는 점을 감안하여 빗물이 문을 통해 실내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문을 수혈의 꼭대기에 달되 덧지붕을 달거나 경사지게 만들었으리라 추측된다. 특히 후한서 동이전 예조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사람이 질병으로 사망을 하면 옛집을 버리고 다시 새집을 만든다.”라고 하였다. 움집이어서 오래 거처하면 위생상태가 나빠졌을 것이므로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기 때문에 이와 같은 건축기법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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