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지리(삶의터전)/제5장 태인의 인구와 취락

제 6절 태인의 취락(聚落) 및 인구분포(人口分布)

증보 태인지 2018. 1. 18. 22:03

6절 태인의 취락(聚落) 및 인구분포(人口分布)1)

 

   취락은 인간이 장기간에 걸쳐 지리적 환경에 적응하면서 창조되고 시간과 더불어 지표상에 누적된 것으로 자연적 기초, 사회경제적 조건, 역사적 배경, 주민의 의식구조와 가치관에 따라 지역적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취락의 발생과 그 발달과정은 지역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인류의 주거공간을 대상으로 적응과 발전의 양식을 지리적 환경과 관련시켜 거기에 내재하고 있는 법칙과 지역 성격을 이해하는 데 있으며 취락의 발달, 형태, 입지, 기능 등의 네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접근방식은 지역의 성격에 따라 그 초점이 각각 다르게 나타나며 우리나라와 같이 오랜 역사를 가진 지역에 있어서는 취락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발달사에 역점을 두어 기원과 변천과정에 대한 추적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저습지나 수리가 힘든 구릉지 등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지역이 경지로 바뀐 시기는 대체로 18C 중반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시기에 이르러 취락의 골격이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일제의 침입과 더불어 시작된 미개간지의 개간과 상업적 농업의 침투, 근대 교통시설의 등장, 그리고 인구의 급격한 이동 등의 과정은 조선시대에 형성되었던 취락의 경관을 크게 변형시켰다.

   우리나라 최대의 미곡 생산지인 호남평야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있어서 중요한 개방대상지였다.

   따라서 일본 시장으로의 미곡 반출을 목적으로 한 일제의 식민지 개발 정책은 현대 수리기술에 바탕을 둔 대규모 관개시설과 미개간지의 개간을 실시하였다. 이로 인해 호남평야의 취락은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으며, 특히 미곡의 반출과 관련된 과정은 교통시설의 확충과 더불어 새로운 중심 취락의 성장을 유도하였다.

   호남평야의 남부지역에 위치해 있는 태인은 일제 강점기 이전까지 태인현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태인은 조선시대 초기 이후 현() 소재지로서 오랜 기간 동안 군치취락(郡治聚落)으로 발전해 왔으며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면() 소재지로 강등된 구읍취락(舊邑聚落)이다.

   이러한 태인의 경관 변화과정을 조선시대, 일제 강점기, 해방 이후의 3단계로 시기를 구분하여 취락의 경관을 고찰하였다. 각 시기는 정치체제뿐만 아니라 인구와 교통체제에 있어서 성격이 상이하게 나타나고 있다.

   호남평야지역의 인구추이를 보면 1910년 이전은 출산율과 사망률이 모두 높은 시기로 인구의 증가율이 매우 낮은 시기이다. 그러나 1910년 초반까지의 기간은 출생률과 사망률이 모두 감소하여 출생율보다 사망률의 감소가 더욱 빨라 인구 증가율이 매우 높은 시기이다.

   교통체제는 조선시대에는 도보와 우마차시대, 일제 강점기는 철도 교통시대, 해방 이후는 자동차 교통시대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러한 교통체제의 변화는 중심취락에 대한 접근성의 변화를 야기하여 태인의 경관을 변화시켰다.

 

1. 조선시대 태인의 취락 형태와 기능

 

   조선 초기인 1418(태종 18)에 현의 소재지가 입지한 이후 지방행정의 중심지로서 태인은 조선 말기 인 1910년에 18개 면을 관할하는 호남평야의 중심취락 중 하나였다. 이러한 태인의 취락형태는 인구 규모가 1910년에 2,787명이었던데 비하여 1789년에 2,842명인 것으로 보아 적어도 1789년 이전에 취락의 골격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취락은 진산(鎭山)인 성황산과 안산(案山)인 항가산의 사이에 발달하여 있었다. 이러한 취락의 입지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촌락이 풍수사상의 영향으로 진산하의 산록이나 계곡을 따라 발달하는 일반적인 경향과 일치하고 있다. <그림 5-1>

 

<그림 5-1> 태인의 입지

 

   취락의 형태는 성황산의 동남쪽 산록에 동헌을 중심으로 한 관가가 집중되어 있고, 그 주변에서부터 향교에 이르는 지역까지 성황산의 남쪽 산록과 항가산의 북서 산록에 민가가 분포하고 있으며, 취락의 중앙을 삼례도(參禮道)가 관통하고 있는 집촌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림 5-2> 조선시대 태인의 중심부

 

   또한, 태인의 중심부와 인접한 거산리에 훈련청(訓練廳)과 거산역(居山驛)을 중심으로 자연부락이 발달해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태인은 성황산과 항가산의 산록에 ''자의 형태로 입지하고 있다.<그림 5-2>

   현의 지방행정 중심인 관가는 외동헌(外東軒)인 청녕헌(淸寧軒)을 중심으로 주위에 내동헌(內東軒, 현존하고 있음), 객사(客舍), 양사제(養士齊), 사마제(司馬齊), 서청(書廳), 마청(馬廳), 사창(社倉), 옥사(獄舍)가 집중되어 있다.<그림 5-3>

 

<그림 5-3> 동헌의 내부구조

 

   훈련청은 중심관아에서 남쪽으로 약 1km 떨어진 거산리에 입지하고 있어 중심관아와 함께 입지되는 경향을 보이는 대부분의 읍취락(邑聚落)과 다른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외에 조선시대의 경관을 특징짓는 시설로는 향교, 거산역, 태거원(泰居院), 피향정(披香亭), 함벽루(涵碧樓), 성황단(城隍壇), 여단(厲壇), 관제묘(關帝廟), 옥천사(玉泉寺), 서현사(西峴祠), 읍원정(挹遠亭), 활터 등과 역대현감(歷代縣監) 등 전임관리의 공적을 기록한 선정비(善政碑), 선덕비(善德碑) 등이 피향정 주변의 도로변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취락의 경관은 조선 말의 대부분의 읍취락이 지니고 있던 경관과 거의 동일한 특징을 보이고 있으며, 기능에 있어서도 유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태인은 조선시대 약 500여 년 동안 현() 소재지로 지방 행정의 중심기능을 행하여 왔다. 또한 충청남도 공주에서 전라남도 영광을 거쳐 제주에까지 이르는 삼례도(參禮道)가 통과하고 있으며, 주변지역과 연결되는 소로(小路)가 집중되어 지방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교통, 통신수단으로는 역(), (), (), (), 봉수(烽燧)가 있는데, 이중 육상교통수단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이었다.

   태인의 거산역은 삼례도의 속역(屬驛)으로서 관이의 규모로 보아 13개의 삼례도 속역 중 3번째 규모에 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인의 정치와 교통의 중심지로서의 위치는 시장의 발달에서도 잘 나타난다. 태인에는 정기시장(定期市場)5일장으로 개설되어 있으며 또한 매일 아침 관아 주변의 삼례도에서 저자가 개설되었다.

   특히 태인은 정읍지방에서 유교문화(儒敎文化)의 중심지로서의 위치를 갖는 지역으로 유교문화의 전통과 현() 소재지로서의 오랜 역사는 지배계급(支配階級)인 양반계급(兩班階級)과 피지배계급인 농민층간(農民層間)의 보다 뚜렷한 계급의 분화(分化)를 진전시켜 순수한 농촌취락과는 매우 상이한 경제적 기능을 갖는 취락으로 발전시켰다. 즉 조선 말기의 대부분의 읍취락과 마찬가지로 태인은 이 지방의 정치, 경제, 교통, 군사의 중심지로 대지주(大地主)와 상인계급(商人階級) 그리고 관리(官吏)들이 읍에 거주하여 비생산적(非生産的), 소비적(消費的) 기능(機能)을 갖고 있었으며, 이 가운데 향교(鄕校), 향약(鄕約) 등의 조직(組織)으로 내부적으로 지연적 관계(地緣的 關係)에서 하나의 통일체(統一體)를 이루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2. 일제 강점기 시대(日帝强占期 時代) 태인의 취락 형태와 기능

 

   일제 강점기는 일제의 침략과 함께 수반된 행정구역(行政區域)의 개편과 근대교통시설의 도입, 그리고 식민지(植民地) 정책(政策) 등으로 인하여 조선시대에까지 유지되어온 취락의 골격과 기능이 변화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호남평야에 있어서 이 시기에 특히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일제(日帝)의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한 산미증산정책(産米增産政策)의 시행 대상지로 수탈 대상이 되었던 것을 꼽을 수 있다. 일제의 미곡수탈정책(米穀收奪政策)은 조선시대까지의 전통적인 자급자족적 산업(自給自足的産業)을 상업적 농업(商業的農業)으로 전환시켰으며, 또한 토지조사사업을 통하여 미개간지에 대한 개간사업을 시행하였다. 호남평야지역에서는 김제군(金堤郡) 광할면(廣活面), 옥구군(沃溝郡) 미면(米面) 등의 해안 간석지(干潟地)의 개척(開拓)과 만경강(萬頃江)과 동진강(東進江) 유역의 습지(濕地)에 대한 개간이 일본정부(日本政府)와 일인 자본가(日人資本家)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 지역에는 많은 일인(日人)이 진출하여 거주하게 되었다. 일제(日帝)의 지원 속에서 자본력을 가진 일본인(日本人)의 이주는 이 지역의 취락(聚落)에 커다란 변화를 야기하였다.

   이 시기 동안 태인군은 정읍군 태인면으로 행정구역이 축소 조정되었다.

   조선시대에 현주소지로서 이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던 태인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이르러 1914년 행정구  역의 개편에 따라 태인군은 정읍군 태인면으로 행정구역이 축소 조정되어 면() 소재지로 강등(降等)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에 비해 행정관할구역이 대폭 축소되어 조선시대에 관할구역에 속했던 18개 면은 태인면, 용북면(龍北面, 신태인읍), 감곡면(甘谷面), 칠보면(七寶面), 산내면(山內面), 산외면(山外面), 옹동면(瓮東面)7개 면으로 분할되고 태인면은 15개 리만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러한 행정구역의 축소에도 불구하고 태인면 소재지의 인구는 1910년의 2,787명에서 1925년에는 3,244명으로 이 기간 동안 약 16.4%의 증가를 보이고 있다.<5-5>

 

<5-5> 태인면 소재지의 인구변화2)

 

한 국 인

일 본 인

기 타

1789

 

 

 

2842

1910

 

 

 

2787

1917

2561

143

10

2714

1918

2665

122

18

2805

1919

2614

114

18

2746

1920

2709

161

16

2886

1921

2808

162

15

2985

1922

2842

143

9

2994

1923

2905

171

13

3089

1924

3004

149

14

3167

1925

3079

150

15

3244

 

   조선시대의 저자가 계속 개설되었으며, 정기시장의 면적은 더욱 확대되어 웃시장(上市場)’아랫시장(下市場)’으로 확대·분할되었다. 1929년에 태인의 정기시장에서 거래되는 연간 판매량은 222,820원으로 호남평야(湖南平野)의 중요한 중심취락(中心聚落)으로서의 위치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행정기능(行政機能)의 약화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계속하면서 중심지기능(中心地機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태인이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전주(全州), 정읍(井邑), 칠보, 신태인 등으로 통하는 주요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중심지로 옹동면, 칠보면, 산내면, 산외면의 서부지역과 정우면(淨雨面), 감곡면 등의 동부지역을 연결하는 중심 지역으로서 이들 지역에 대한 중심기능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때에 와서도 취락의 전체적인 형태는 조선시대와 거의 유사한 모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부터 있던 삼례도와 거의 같은 위치에 새로이 1번국도(國道)가 개설되었고, 이 도로를 따라 근대적인 각종 같은 공공시설과 상가가 입지하면서 취락의 면모가 일신되었다. 이와 함께 취락은 서남방향으로 확대되고 취락 중심지의 위치도 성황산 동남부의 옛 위치에서 국도를 따라 서남방향(西南方向)으로 이동하게 되었다.<그림5>

   당시의 주요 공공기관은 면사무소(面事務所), 주재소(駐在所), 우편소(郵便所), 금융조합(金融組合) 등으로 이들 공공기관은 초기에 동헌(東軒)과 그 부속건물들을 사용하다가 점차 태인의 남서부 도로변으로 건물을 신축하여 이동하였다. 공공기관의 이전 후 조선시대의 관아건물은 외동헌을 제외하고 모두 헐리었으며, 동헌과 부속건물이 위치한 장소에 보통학교가 설립되어 조선시대의 행정의 중심 지역이었던 이곳은 그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반면에 주요 공공기관이 입지하게 된 남서부의 국도변은 새로운 상가가 입지하게 되어 신중심지로서 성장하게 되었다.

 

<그림 5-4> 일제 강점기 시대의 태인 중심부

 

   정기시장은 규모가 증가하여 이조시대의 저잣거리를 중심으로 한 웃시장(上市場)외에 아랫시장(下市場)과 우시장(牛市場)이 새로이 개설되었다. 아랫시장은 피향정을 둘러싼 연못 중 상연지(上蓮池)를 매립하여 형성된 것이며, 우시장은 하연지(下蓮池)의 남쪽에 새로 개설된 것으로 이들 신시장(新市長)은 취락의 확대와 중심지의 이전에 기여하였다.

   호남평야의 대부분이 주요 취락과 마찬가지로 취락내부의 변화는 일인(日人)들의 이주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태인에 거주한 일인(日人)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으나 농업 이외의 상업 활동에 종사하였으며, 호남평야의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취락의 중심부에 밀집하여 거주함으로 취락의 내부형태를 크게 변화시켰다.<그림 5-4>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이어서 태인의 취락형태는 조선시대의 골격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나 관제개혁(官制改革)에 의한 새로운 공공기관(公共機關)의 설립과 일인(日人)들의 주택과 상가의 등장으로 인하여 내부구조에 있어서는 큰 변화가 있었다. 기능에 있어서는 행정기능의 축소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시장기능은 계속 유지되었다.

 

3. 해방 이후 태인의 취락 형태와 기능

 

   이 시기는 농지개혁(農地改革)의 실시와 인구의 계속적인 도시집중(都市集中), 6.25로 인한 취락의 파괴(破壞) 등으로 인하여 우리나라 취락에 커다란 변화가 야기된 시기이다.

   1962년부터 실시된 우리나라의 공업화정책(工業化政策)은 소수의 대도시(大都市)에 대한 인구의 집중을 야기하였으며, 이와 함께 농촌지역의 인구는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또한 자동차 교통의 발달은 주변 도시에 대한 접근성을 향상시켜 농촌중심취락(農村中心聚落)들의 쇠퇴를 유도하였다.

   이러한 우리나라 전체적인 취락공간구조의 변화와 마찬가지로 취락이 쇠퇴하는 경향이 보이고 있다. 해방이후 태인면의 행정구역은 1983년에 백산리가 신태인읍(新泰仁邑)으로 편입된 것을 제외하고는 일제 강점기 시대와 동일하다. 태인면의 인구는 1960년대 중반까지는 계속된 증가를 보이고 있다.

   해방 이후 태인면의 행정구역은 1983년에 백산리(栢山里)가 신태인읍으로 편입된 것을 제외하고는 일제 강점기 시대와 동일하다. 태인면의 인구는 1960년대 중반까지는 계속된 증가를 보이고 있다.<5-6>

 

<5-6> 태인면의 인구변화3)

 

인 구

증 가 율

1953

17,023

 

1964

20,575

20.9

1966

21,414

4.9

1970

19,496

-9.0

1974

19,334

-0.8

1978

16,425

-15.0

1983

12,632

-23.1

1988

9,902

-21.6

 

 

   그러나 1960년대 중반 이후 인구의 감소가 진행되기 시작하여 1970년대 이후에는 급격한 인구의 감소를 보이고 있다. 태인면 소재지(所在地)를 구성하고 있는 8개 부락의 인구는 1988년에 2,903명으로 일제 강점기 시대에 비하여 취락이 쇠퇴(衰退)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60년 중반 이전의 취락형태는 규모(規模)에 있어서는 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정기시장(定期市場)의 위치가 하연지의 서편으로 이전되고 태인기술학교(泰仁技術學校), 태인중고등학교(泰仁中高等學校)와 태인여자중학교(泰仁女子中學校)가 취락의 외연부에 새로이 설립되어 취락의 확대가 이루어졌다. 취락 내부에 있어서는 일제강점기시대의 정기시장터가 주택지로 변모(變貌)하였고, 일제 강점기 시대의 공공건물이 상가로 전환되면서 도로변에 상가가 들어서게 되었다. 산업별 인구구성에 있어서도 이 시기 동안 농가의 구성 비율이 감소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5-7>

 

<5-7> 태인면의 농가비율4)

 

총농가수

농가수

비율

1964

3,441

2,702

78.5

1966

3,537

2,580

72.9

1970

3,417

2,807

82.1

1974

3,126

2,702

86.4

1978

2,955

2,594

87.8

1983

2,550

 

 

1988

2,392

2,133

89.2

 

   따라서 60년대 중반까지의 취락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 비해 취락의 내실화(內室化)가 진행되었으며 또한 일제 강점기 시대와 동일한 중심지 역할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60년대 중반 이후는 태인면의 급격한 인구감소와 함께 태인의 쇠퇴가 나타난 시기이다. 이 시기 동안 태인의 농가 비율은 1966년의 72.9%에서 1988년에는 89.2%로 증가하면서 순수한 농촌취락으로 변모(變貌)하였다. 취락의 내부구조는 60년대 중반 이전과 거의 유사하지만 빈 상점과 빈집이 발생하고 있다.

   현재의 상가는 일제 강점기 시대의 아래시장 부근에서부터 정기시장 부근까지 도로변에 발달하여 있다.<그림 5-5> 상설점포(常設店鋪)의 업종별 분포는 약 50여 종으로 정기시장과 함께 기초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 <5-8> 태인은 과거에 비하여 중심지로서의 기능이 약화되긴 하였으나 여전히 소지역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림 5-5> 1989년 태인상가

 

<5-8> 상설점포의 업종별 분포5)

업 종

점포수

업 종

점포수

식품, 잡화

20

26. 연 탄

1

2. 음식점

19

27. 체육사

1

3. 미용실

13

28. 서 점

1

4. 의상실, 양복, 양화

10

29. 미곡상

1

5. 다방, 제과점

8

30. 주유소

1

6. 농약, 사료, 종묘

8

31. 정미소

1

7. 오락, 유흥업소

7

32. 이불집

1

8. 학 원

6

33. 철물점

1

9. 정육점

4

34. 복덕방

1

10. 전자, 가전제품

3

35. 인쇄소

1

11. 자전거 수리소

3

36. 예식장

1

12. 가축병원

3

37. 유 리

1

13. 세탁소

3

38. 농기계 수리소

1

14. 한약방, 한의원

3

39. 시계, 보석

1

15. 목공소

3

40. 체육관

1

16. 문구점

3

41. 전파사

1

17. 완구점

2

42. 병 원

1

18. 지업사

2

  43. 장의사

1

19. 포목점

2

 44. 타이어 수리소

1

20. 방앗간

2

45. 화장품

1

21. 가 스

2

46. 화원

1

22. 사진관

2

47. 건재사

1

23. 약 국

2

48. 건강원

1

24. 솜틀집

1

49. 닭 집

1

25. 신 발

1

156

   이 시기에 있어서 태인의 급격한 쇠퇴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농촌중심취락과 마찬가지고 대도시로의 인구유출과 교통의 발달에 따른 주변도시에 대한 접근성의 증대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1980년대 이후의 시내버스의 운행은 정주시(井州市)에 대한 접근을 용이하게 하여 태인의 상권(商權)을 크게 위축시킴으로서 태인의 지역주민에 대한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더욱 약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4. 현재 태인의 촌락 실태

 

   태인에 위치하는 대부분의 마을은 논농사와 밭농사를 주로 하고, 태성리, 태창리, 태흥리, 거산리가 취락의 중심지를 형성하고 있다. 옹동면 상산리(象山里)에서 태인 북쪽으로 흐르는 견천(犬川)을 따라 북쪽 시루봉 남쪽 자락에 형성된 증산리와 남쪽으로 고천리가 자리잡고 있고, 계속해서 서쪽으로 흘러가며 박산리, 궁사리를 이루고 있다. 남쪽으로는 태인천이 서쪽으로 흐르는데 이 곳 평야지대에 태서리, 매계리, 오류리, 태남리가 자리잡고 있고 태인천 하류에 낙양리, 오봉리가 있다.

   태인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마을의 역사가 10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곳은 거산리, 태흥리, 낙양리, 태서리 등 이고 800년 이상인 마을은 궁사리, 증산리이다. 6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마을은 박산리,고천리 등 이고 500년 이상은 태성리, 태창리, 매계리, 태남리이다.

   마을의 가구수를 기준으로 200가구 이상의 큰 마을은 태창리, 태성리, 태흥리이고 100가구 이상은 오봉리, 태서리, 낙양리, 거산리, 박산리, 고천리, 매계리, 증산리이다. 비교적 작은 마을은 궁사리, 태남리, 오류리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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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李標鎔, 泰仁新泰仁空間構造 比較 硏究(1990), 623.

2) 서울大學校 古典刊行會 (1971), 戶口總數 (1789). 1917以後朝鮮總督府 統計年報, 各 年度.

3) 정읍군 통계연보, 각 연도.

4) 정읍군 통계연보, 각 연도.

5) 현지조사(1989)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