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문화유적(삶의 자취)/기타 비지정 문화재

하마거리(일명 하마청거리)

증보 태인지 2018. 6. 4. 13:38

하마거리[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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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위치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향교마을(전라북도 태인군 군내면 지역)

    지명의 유래와 역사

   태인향교가 있는 태성리는 본래 태인군 군내면 구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사창리, 사리, 육리, 칠리, 십리, 십일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이곳에 태인향교 대성전이 있기 때문에 태성리라 하고 정읍군 태인면에 편입하였다. 향교마을의 이름도 향교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태인향교를 마주보면 왼편에 태인사거리가 있는데 예전에는 하마가(하마거리)라고 했다.

   사거리는 예전에는 삼거리였는데 향교 앞으로 새 길을 만들어 사거리가 되었다.

   태인사거리에서 1번 국도를 타고 태인면사무소 방향으로 전북동화중학교를 지나 200m 정도 가다보면 왼편에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예전에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말을 내렸다고 한다. 하마비(下馬碑)란 누구든지 그 앞을 지나갈 때,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비석입니다.

   궁궐, 종묘, 문묘 또는 왕이나 성현의 탄생지나 묘소 앞에 세워 지나다니는 사람으로 하여금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게 하였는데, 1413년(태종 3)에 종묘와 대궐 문앞에 처음으로 세웠다고 합니다.

 


   대순진리회 성적(聖蹟) - 성지 관련 행적

 - 1907년 4월 3일 신원일을 태인으로 보내심.
 - 다음날인 4월 4일 객망리 주막에서 머무심.
 - 다음날인 4월 5일 태인 하마가에 가심.
    - 태인 하마가의 한산 객주집에서 벽력으로 여인을 응징하심.

   관련 <전뎡) 구절

   행록 3-35. 상제께서 정미(丁未)년에 원일에게「내가 四월 五일에 태인으로 갈 터이니 네가 먼저 가서 사관을 정하고 기다리라」고 이르시고 원일을 보내셨도다. 상제께서 이튿날 고부 객망리의 주막에 이르러 형렬에게「나는 이 곳에서 자고 갈 터이니 네가 먼저 태인에 가서 원일이 정한 사관에 자고 내일 이른 아침에 태인 하마가(下馬街)에서 나를 기다리라」하셨도다. 형렬이 원일을 만나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그곳에 이르니 마침 장날이므로 일찍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였도다.

   행록 3-36. 상제께서 이 곳에서 형렬을 만나 그를 데리시고 한산(韓山) 객주집에 좌정하시고 원일을 부르셨도다. 상제께서 원일에게「술을 가져오라. 내가 오늘 벽력을 쓰리라」하시니 그는 말씀에 좇아 술을 올렸더니 상제께서 잔을 받으시고 한참 동안 계시다가 술을 드시니 여태까지 맑았던 날씨가 갑자기 음풍이 일어나고 폭우가 쏟아지며 벽력이 크게 일어나니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태인에 유숙하는 사람이 많았도다.
   상제께서 이 일에 대하여 형렬과 원일에게 설명하시기를「내가 이제 아침에 객망리 주막 앞을 지날 때에 한 소부가 길가의 풀에 내린 이슬을 떨며 지나가기에 그 연유를 물으니 그 소부가 친정의 부음을 듣고 가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그 뒤를 한 노구가 지팡이를 짚고 가며 소부의 자취를 묻는도다. 내가 그 연유를 따져 물었더니 그 노구가 앞에 간 소부는 나의 며느리이나 가운이 불행하여 어제 밤에 자식을 잃었는데 며느리가 장사를 치루기 전에 오늘 새벽에 도망 갔나이다. 며느리는 저희끼리 좋아서 정한 작배이니다고 대답하더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그들에게「대저 부모가 정하여 준 배필은 인연이오. 저희끼리 작배한 것은 천연이라. 천연을 무시하여 인도를 패하려 하니 어찌 천노를 받지 아니하랴. 그러므로 오늘 내가 벽력으로써 응징하였노라」고 하셨도다. 그 며느리는 벽력에 죽었노라고 전하는도다.

   교법 3-13. 상제께서 몇 달 동안 경석을 대동하시고 공사를 보셨도다. 이때 상제께서 임파(臨陂) 최 군숙(崔君淑)의 집에 머물고 계셨는데 어느날 이곳을 떠나 동곡에 들르지 아니하고 바로 태인으로 가셨느니라. 이 일로써 광찬은「우리는 다 무용지물이라」고 더욱 불평을 품고 상제를 크게 원망하는지라. 형렬은 민망하여 태인 하마가로 찾아가서 상제를 배알하고 광찬의 불평을 알리면서「어찌 그러한 성격의 소유자를 문하에 머물게 하시나이까」고 의견을 아뢰니 상제께서「용이 물을 구할 때에 비록 가시밭 길이라도 피하지 않느니라」고 말씀하시니라. 형렬이 곧 돌아와서 광찬에게「고인 절교 불출오성(古人絶交不出惡聲)」이라 이르고 금후부터 불평을 말끔히 풀라고 달랬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