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문화유적(삶의 자취)/국가지정 문화재

2. 조선시대 피향정 연혁

증보 태인지 2018. 6. 8. 10:32

2. 조선시대 피향정 연혁

 

   피향정의 창건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몇 차례에 걸쳐 중수했던 기록과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첫 번째 중수 기록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임진왜란 직 후인 광해군 때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이지굉(李志宏)이 광해군 때인 16151618년 사이에 태인 현감을 지내는 동한 초라한 피향정을 크게 확장하는데 현재의 모습은 이 때 중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지굉의 중수 근거는 유근(柳近)이 철종 때 쓴 피향정 중수기에 아주 미약하게 근거가 나타나고 있다. 「…이첨추의 계속된 수리(李僉樞之繼修 )가 그것이다.

   그 후 현종 대에 들어와 현감 박숭고(朴崇古)가 다시 중건을 하게 된다. 박숭고는 현종 때 태인 현감을 하게 되는데 이때가 1661년부터 1664년까지이다. 따라서 이지굉이 광해군 때인 16151618년 사이에 피향정을 크게 확장한 이후 약 50여 년이 지난 시기가 된다. 박숭고가 퇴락한 피향정을 중수했다는 기록은 해체보수공사가 진행되던 20038월 상량문이 발견됨으로써 알게 되었다. 이 상량문은 종도리 장여에 직접 쓴 것인데 종도리에는 상량문과 찬시가, 종도리 장여에서는 공역에 참여했던 인물이 각각 기록되어 있었다. 그 상량문과 찬시는 다음과 같다.

 

<披香亭 重創 上樑文>

 

名於南者 曾草創於前時 易而新之 更華構於今日 非人之力 有待而然 顧惟時山 號是仁縣 最形勝於渭北 金華別區 擅佳麗於江南 錢塘名境 爲建列仙之館 以看君子之花 綠盖亭亭 少千丈於王井 紅臉綽綽 多十里於西湖. 太乙眞人, 何用施基蘭枻大堤遊女, 始覺來於凌歌. 凌金波於步虛 金殿水府; 朝玉京於手把, 玉女明星. 玆有遠馥益淸, 庸揭披香美號. 新芳透於枕席, 坐臥起居; 晩馨襲於衣巾, 朝暮醒醉, 葉嶼花島, 畵圖中之依依; 郁氣淸芬, 雲海間之梟梟, 孤雲一片, 樓彩軒者何年明月千秋, 留勝事於後日. 幾多歲月之續惜有漫漶之歎. 今欲長府改爲, 仍問太守誰也芙蓉城裡, 知是通判之石卿; 南昌縣中, 乃有仙尉之梅福. 風韻暢明, 襟期灑落. 狹小舊制, 宏闊新規. 百廢俱興, 三王與列, 爰始岳陽之役, 愧非山斗之文.

 

兒郞偉抛梁東 窓納餘香曉旭紅. 萬象氤氳是物色, 隔簾靑鳥報春風.

兒郞偉抛梁南 靑烟密葉覆探潭. 瑤軒不受人間署, 六月淸霜灑壁簾.

兒郞偉抛梁西 灝氣遙通碧骨堤. 烟霧宛聞金母語, 曲欄珠箔向空低.

兒郞偉抛梁北 撲地閭閻星拱極. 百卉凋殘自斂收, 物華總入天寥廓.

兒郞偉抛梁上, 微明曙色雲羅帳. 依然仙女太淸歸, 雲外疑聞環珮響.

兒郞偉抛梁下, 俯見波仙開綺榭. 庭除渾作碧瑠璃, 萬斛明珠終日瀉.

 

伏願上梁之後, 祥風不止, 茁葉探根, 眺三秋之佳氣; 花日長明, 浮花浪蘂, 經萬春之休光.

 

<피향정 중창 상량문>

 

   남녘에 이름난 정자, 예전에 일찍 창건했고, 다시 새로 지어 오늘 화려한 중창 있었네. 이는 사람의 힘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하늘은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일레라. 돌이켜 보면 시산(詩山)은 태인 고을이라 부르기도 하나니, 강북에 으뜸가는 명승지라, 중국의 별천지 금화(金華)와 같고, 강남의 아름다움 독차지하니, 중국의 명승지 전당(錢嵣)의 고을. 신선이 노닐던 정자, 세우려 함은 군자의 꽃, 연화(蓮花) 보고파서. 푸른 기와 반듯하니 중국의 천 길 드높은 왕정(王井)도 이에 비해 적을 테고, 붉은 단청 아름다워 서호(西湖) 십리보다 크구려. 태을진인(太乙眞人)이 어이 난초의 노, 저을 게 있으랴? 강 언덕에 노니는 여인, 연 캐는 노랫가락 흥얼흥얼. 허공을 거니는 듯 황금물결에 뱃놀이, 황금대궐의 수중누각이요, 하늘 위, 옥경(玉京)이 손에 잡힐 듯, 직녀의 밝은 별. 멀리 느낄수록 해맑은 향기 너무도 맑아서 정자 이름, 피향이라 그 이름도 아름답네. 새록새록 갓 피어난 향기, 베갯머리 스며드니, 앉으나 누우나 이곳에 노닐 테고, 벙그러진 연꽃향기, 옷깃에 젖어드니 아침저녁 향기에 취하누나. 연잎, 꽃잎 덮인 섬은 아름다운 그림 한 폭이요, 맑고 고은 향기, 안대 속에 넘실넘실, 외로운 조각구름, 정자 감싼 지 몇 해련가? 천추의 밝은 달빛, 후세 길이 남아있다. 얼마나 세월 이어져왔나? 애석히도 훼손되어 긴 한숨 절로 난다. 다시 정자 고치려하니 이 고을 원님, 어떤 분이실까? 연꽃 둘러싸인 고을, 이름난 판관 석경

   (石卿)이요, 남창 고을, 신선 원님 매목(梅福) 같구려. 풍모와 운치가 툭 트여 밝으니, 가슴속이 해맑은 듯. 협소했던 옛 건물이 크고도 드넓은 새로운 규모여라. 고을의 온갖 일, 다시 부흥되어 삼왕(三王)의 인정(仁政)을 함께 하였네. 동정호 악양루의 큰 역사에 대문호 명문(名文)이 아니어서 부끄럽구려.

 

어영차! 동녘으로 상량 더지니

창가의 연꽃 향기, 아침 햇살 붉어라

삼라만상 정기 어려 물색 빛나니

주렴 건너 파랑새, 봄바람 알려오네

 

어영사! 남녘으로 상량 던지니

푸른 연못, 연기어린 연잎 뒤덮여

높다란 정자, 무더위 볼 수 없고

오뉴월 찬 서리, 주렴에 내리누나.

 

어영차! 서쪽으로 상량 던지니

맑은 물빛 저 멀리 벽골제에 비추네.

안개 속에 선녀의 속삭임 들리는 양

난간 주렴 나직이 허공에 하늘하늘

 

어영차! 북쪽으로 상량 던지니

여염은 널려있고 뭇별은 북두성 향하네.

온갖 풀잎 시들어 성숙할 즈음

화려했던 옛 모습, 텅 비어 적막하다

 

어영차! 위로 상량 던지니

여명의 햇살, 구름 사이 스며들고

어렴풋 태청궁 돌아가는 선녀가

구름 밖 저 멀리서 옥 소리 올리는 양

어영차! 아래로 상량 던지니

푸른 물결 푸른 유리 펼쳐놓아

영롱한 구슬, 일만 섬이 진종일 쏟아지네.

 

   엎드려 원하건대, 상서의 바람 멈추지 않아 무성한 잎에 깊은 뿌리, 계절 따라 서기(瑞氣) 어리고, 하늘의 햇살 길이 밝아 물위에 뜬 연꽃이여, 만세에 길이 빛나기를…….

 

   종도리 장여에서 공역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숭정갑진 3월에 박등내(朴等內, 생몰연대 불명)가 썼으며 이때는 조선 현종 5(1664)으로 청나라 강희(康熙) 3년이 된다. 좌수(座首)는 김여성(金汝盛)이고 별감(別監)에는 송원상(宋元祥)과 김명혁(金鳴奕)이고, 대동유사(大同有司)에는 김명진(金鳴震)과 송익수(宋益壽)가 도장(都將)에는 전우현(全右賢)과 은기호(殷基護)이고, 도감관(都監官)에는 권 순(權 珣 )이고 연재도감(練材都監)에는 송수일(宋守一)이고 석주도감(石柱都監)에는 김사용(金泗龍)이고 성조색(成造色)에는 조덕명(趙德明)과 시경유(柴慶迪)이고 사령(使令)에는 김옥생(金玉生)이참여했다. 이밖에 대목(大木)으로 경상도(慶尙道) 대구(大邱) 동화사(桐華寺)에 소속된 승려(僧侶) 각원(覺元)과 성탄(性坦)이 도편수(都邊手), 주목편수(柱木邊手)로 임매산(林每山), 주두편수(柱頭邊手)로 박응록(朴應祿), 입공편수(立方邊手)로 허상은(許尙銀)이 참여하였다. 공방편수(功方邊手)로는 승려 영택(令擇), 장설편수(長舌邊手)에는 승려 상현(尙賢), 평방편수(平防邊手)에는 박성금(朴成金), 도리편수(道里邊手)에는 송정길(宋丁吉), 공사원(公事員)에는 김사리(沙里), 노기봉(盧己奉), 권 봉(權 奉), 승려 경민(敬敏), 장무(掌務)에는 김말용(金唜龍), 이흘운(李乭云), 전금생(全今生), 최 생(崔 生), 김귀사(金貴思), 승려 해 완(海 完), 서태영(徐太永), 전계립(全戒立), 이추일(李秋日), 도사(助使)에는 정사세운(鄭士世), 금구(金溝) 김회윤(金回允), 장득생(張得生), 김수생(金守生), 고부(古阜) 김 복(金 福), 정읍(井邑) 승려 계오(戒吾)와 옥규(玉奎), 순창(淳昌) 김애진(金愛進), 박귀생(朴貴生), 승려 일장(日壯), 석수편수(石手邊手)로는 안명현(安明玄), 지시백(池時白), 지사남(池士男), 김남수(金南首)가 참여하였고, 금구(金溝) 김수생(金首生), 고부(古阜) 이백윤(李白允), 야장(冶匠)으로 김유금(金留金), 피향직(披香直), 김춘금(金春金), 호장(戶將)에는 시몽룡(柴夢龍), 이방(吏房)에는 송지징(宋之徵), 호방(戶房)에는 송만생(宋萬生), 예방(禮房)에는 최지영(崔致榮), 공방(工防)에는 김유철(金有喆), 형방(刑房)에는 유 술(柳 述), 공방(工房)에는 김일용(金逸龍)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상량문은 그 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이번에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그 동안 현감 박숭고의 중건사실은 이후에 쓴 피향정 중수기에 간단히 언급되어 있었기에 알 수가 있었으나 다른 어디에도 명확한 근거가 없었던 터였다. 즉 현종 때 박숭고의 중건이 있은 후 51년이 지난 1715(숙종 41)에 피향정을 다시 크게 중수를 하게 되고 중수하고 나서 유근이 피향정 중수기를 썼는데 그 중 한 문장1)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한 문장2)에 숭정(崇禎) 갑진(甲辰) 때 박숭고가 중건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현종 때 박숭고의 중건사실을 밝혀줄 상량문은 그 어디에도 별도로 기록해 두지 않았기 때문에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박숭고의 중건사실은 숙종 때 보수를 하면서 상량문이 발견되었었고, 따로 기록해 두지 않고 종도리와 장여부재가 상하지 않아 그대로 썼기 때문에 유근이 쓴 상량문에 박숭고의 중건 사실을 명확하게 밝힐 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715(肅宗 42)에 피향정 중수공사는 현감 유근이 주도하였는데 그는 이 공사를 위해 전라 감영(監營)과 호조(戶曹)의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부안 변산(邊山)에서 좋은 재목을 뽑아 나라에서 주는 태창미(太倉米 : 政府米)를 얻어 중수 공사를 하게 된다. 당시 피향정을 중수한 내용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대단히 큰 공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변산에서 좋은 목재를 구해 와서 기와를 고쳐 올리는 건축공사와 더불어 연못을 크게 파내는 조경공사도 있었다. 이 공사는 또한 배고픈 민()들에게 일을 만들어 줌으로써 기근에도 도움을 주려고 했던 것 같다.

   유근이 쓴 피향정 중수기는 다음과 같다.

 

<披香亭重建記文>

 

蓋聞天上佳顧 在聲 不聞之鄕 海中銀臺 卽微茫難求之域 鵬霄萬里 適資離禽之嘲 驚背三山

空抗燕土之腕是皆六合之外 群聖存 而不論豈若四海之問 一世所以得以萬目者哉 至於 唐家一時之制徒 置沈水之材 漢室十里之關 只誇凌霄之栢雖曰曲盡乎人巧亦非自得於天然哉 披香之爲亭也 非明顯敞之 稱非輪환장麗之謂始營構寔取便於延賓 前臨大池 別有宜於翫物 百頃涵鏡若對錢湖之唐 十丈開花曾移玉井之種 露浥紅渠之苒寔風 飜翠盖之依依 濂園物理之靜觀 受凈植之淸遠竹樓世慮之逍遺 何待薰爐之焚燒 乍燕寢之凝淸 脫蘭室之生臭 始同令君之坐席

長留異可笑博望之乘搓 遠求安息 疑曼陀之散雨 卽色空兮非太乙之泛波 孰披拂兮聊暇日而萬賞 得古人之命名 是邑也 海東名區 湖南勝地 名賢碩士之所經莅 騒人韻客之所詠嘆 學士高風尙瞻武城之祠宇 靈川遺化 不廢文翁之講堂 惟鉉享之更佳 寔廣與之攸記詩山北峙 邐迤畵屛 洛坪西關 縱橫繡陌 柳外溓幕爭衿 大提之繁華 花間女娘 總解通塘之歌曲 朴藍務之增拓 得得結構之良 李僉樞之繼修 實多潤色之美 矧乎銀狗鐵索 東相國之題 白露秋蓮 石川詞伯之什 久而各擅於一路 亦嘗圖入於重震 嗚呼成毁無常 盛哀有數 雨凌風震攘失周詩之翬飛 歲荒民飢 根變南國之鳥昧 非徒行路之嗟惜 無復使華之登臨 武昌之樓日類 幾多仙鶴之訴 曲江之享 秋晩 不聞吏部之吟 太守百廢未興 三宜不去 還如子京之在巴郡 適値丘樓之圯類 從異仲舒之治江西 詎援 勝閣之修飾 敢云政通而民里 不計時屈而擧瀛 趙淸獻之修城隍 亦爲辰范文正之興士木 豈日非時 遂乃奏記營門 移書地部(戶部) 寫美材於蓬島 役不逾期 損玉粒於太倉 粮無告匱 易桶改瓦 咸引舊而增新 滌池疏塘宛浮紅而泛綠 昔之腐墨荒檅 今焉續素芳菲 畵陳亂雲影落馮夷之窟 朱欄輝日色 존진仙之居 梅峽谷之單衣 滿室濃都 莊漆園之化蝶 宿花夢魂 人稱湖浪翁 自愛花中之君子 存諸中者發外 所貴-德之淸聲 無廢後而多前 惟翼同志之勉勖

 

聖上四二年 乙末 柳夏 完山 柳近 思淑稿

思淑 - 柳近

 

 

<피향정 중건기문(披香亨 重建記文)>

 

   대개 들으니 하늘 위에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을에 있고 바다 가운데 은대는 곧 아득 하여 구하기 어려운 지경이며 붕새가 만 리 하늘을 날아도 마침 울타리 새의 조롱을 취하고 자라 등에 삼신산은 공연히 연나라 협사의 팔을 쥐게 하나 이 천지 사이에 여러 성인이 있었으되 의논하지 않았으니 어찌 사해 사이에 한 대(한데) 보는 취미에 맞은 것을 얻음만 하랴. 당나라에서 한때 도읍을 재건할 적에 물에 잠긴 재목을 두었고, 한나라는 심리의 관문에 다만 하늘에 닿은 나무를 자랑하니 아무리 사람의 기교를 곡진하게 하였다 할지라도 또 스스로 천연의 아름다움을 얻은 것은 아니도다.

   피향정은 높고 드러나지도 않고 헌걸차고 웅장하지도 않아 처음 경영이 작았으니 이는 손 을 맞는 데 편리함을 취함이었으나 앞으로 큰못이 있어 별도로 물건 구경하는데 마땅함이 있으니 백 이랑 잠긴 지경은 전당호를 대한 듯 열 질 핀 꽃은 마침 옥샘에 종자를 옮긴 듯 이슬에 젖은 붉은 연은 우거지고 바람에 날리는 푸른 일산이 간들거리니 주렴게의 뒤 원에서 물리를 고요히 보는 듯 정결한 식물에 맑음을 받았고 대숲에서 세상 생각을 소견함을 원하니 어찌 화로에 사르는 향을 기다리리. 잠깐 편안하게 자는데 맑게 어리니 난초 집에 냄새 나는 것처럼 즐겁고 자못 영군의 좌석과 같아 오래 기운이 머물었고 박망후에 때 타던 것이 가소롭고 멀리 편히 쉴 곳을 구함에 만다라에 흩어진 비를 의심하고 색이 빔이여 태을성이 물결에 뜬 것도 아니요, 누가 헤치고 떨침이여 여갓날에 옛사람이 이름한 곳을 얻어 구경할까. 이 고을은 해동의 명구요 호남에 승지라 명현과 석사가 원자리를 지냈고 글하는 사람과 운치 있는 손이 읊고 감탄한 곳이며, 학사에 높은 풍채 오히려 무성에 사당을 보고 연천에 남은 교화 문옹에 강당이 폐하지 않았는데 오직 이 정자가 다시 아름다우니 이는 여지에 기록한바 시산이 북으로 솟아 그림 병풍을 두른 듯 낙평이 서로 막혀 수놓은 두둑이 얽히어 버들 밖에 주렴과 장막이 다투어 자랑하고 큰 언덕에 번화는 꽃사이 여인이 다 지당을 통하는 노래 곡조를 아는 도다.

   박감무의 더 개척함은 이미 집짓는 양공을 얻었고 이첩추의 이어서 수리함은 실로 윤택한 빛에 아름다움이 많았으니 진실로 은갈 고리 쇠줄이라 함은 동강 상국이 씀이요, 흰 이슬과 가을 연은 석천 사백의 물건이라 오래 각각 한때를 독점하고 또 거듭 떨치기를 도모했더니 아아 이루고 훼손됨이 떳떳함이 없고 성하고 쇠함이 수가 있어 비가 덮치고 바람이 떨쳐서 시전에 꿩이 나는듯함을 잃었고 흉년과 기근으로 남극에 별모임이 뿌리까지 변하여 거저 길 가는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길 뿐 아니라 다시 사신도 오르내리지 않아 무창에 누가 날로 무너지니 얼마나 선학의 애소가 많았으며, 곡강 정자에 가을은 늦은데 이부에 읊는 소리 들리 지 않고 태수도 백가지 폐단으로 일으키지 못하나 삼의는 가지 않았으니 도리어 자경이 파군에 있는 것 같아 마침 언덕에 누가 무너짐을 당하나 비록 동중서가 강서 다스리던 일과는 다르나 어지 등왕각에 수리를 늦추랴. 감히 말하노니 정사는 통하고 백성은 근심하나 때가 어기고 일이 큼을 헤아리지 않으니 조청헌의 성을 수리함은 기민 먹이기 위함이요 범문정의 토목공사 일으킴은 어찌 때가 아니라 하랴. 드디어 감영에 아뢰고 호부에 통하여 쓰며 좋은 재목을 변산에서 구하여 역사가 시기를 넘지 않고 곡식을 창고에서 덜리니 양식이 다하지 않았으며 대를 바꾸어 기와로 고치고 다 옛 규모를 인용하여 새롭게 하였으며 못을 파서 넓히니 붉은 연과 푸른 잎이 떠니 옛적에 썩고 더러움이 이제는 그림처럼 붉은 난간이 날에 빛나 빛이 신선의 집보다 나으니 매화 골짜기 꽃이 집에 가득해 향기 자욱하고 장주의 뒤 원에 나비로 화하여 꽃에 자며 꿈꾸는 혼을 사람들은 호랑옹이라 한다.

   스스로 꽃 가운데 군자를 사랑함이 마음에 있어 밖으로 발함이요, 한 덕이 맑고 향기로움을 귀하게 여김이니 뒤에 폐하고 전보다 사치로움이 없기를 오직 동지들이 힘쓰기를 바라노라.

   성상42(1715) 을미 류하 완산 유근 사숙 씀

   ※사숙...유근의 자

 

   『태인현지(1786)는 상연지와 하연지가 구분된 최초의 기록이며 상연지 주() 500(), 하연지 주() 510()로 기록되어 있다.(현재의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상연지는 620.40m, 하연지는 632.81m로 하연지가 더 큰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

 

   그 후 140년 동안 그 어디에서도 더 이상 피향정의 중수나 중건기록은 보이지 않고 있다. 숙종 때 피향정을 크게 중건한 다음 140여 년이 지난 1855(철종 6) 현감 유근은 피향정을 다시 크게 중건하게 된다. 물론 140여 년 동안 사소한 보수는 여러 번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기록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1855(철종 6) 현감 이승경(李承敬)은 중수한 지 140년이나 되어 퇴폐한 것을 보고 책임을 느껴 중수 공사를 시작하게 되는데 이 공사에는 인부(人夫) 2,692, 장인(匠人) 517명이 동원 되었고 공사비로 엽전 1,600꾸러미[]가 들여서 동량(棟樑)만을 그대로 두고 모두 갈았다고 한다. 전체 공사 기간은 18552월에 시작하여 50일 정도 걸렸다고 한다. 이 정도의 공사량이라면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공사였던 것이라 하겠다. 이승경은 이 공사를 하면서 백성들에게 부역도 시키지 않고 농가에 부담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피향정 중수 후 이승경이 남긴 중수기는 다음과 같다.

 

<披香亭重修記>

 

不佞守泰山之 趙明年 甲寅吏士咸造而言曰 邑之披香亭古也 文昌文淸之蹟赫赫 在柏壁間 且邑西之鎭也 今頽之久矣 古不可廢鎭不可虛蓋新之 余曰旰 守土者之責也 顧役於吏事未遑也 秋歲大登民用咸和乃伐材鳩功 以乙卯二月上旬 相役凡用夫二千六百九十二 匠五百十七 鈔一千六百緡 有餘匝五旬而功旣訖 會父老而落之士有執爵而言者曰 亭之修百四十年 所桷折欞推惟棟樑在耳 一朝毁者完欹者正 炳然復舊觀而增其麗 吾以是爲亭賀又執爵而言曰 是役巨創 也其始也擧憂之及不役于民不斂于 農人不知役而樂其咸 吾以是爲縣民賀 又執爵而言曰 邑治于野少 泉石林園之觀獨斯亭也 爲湖右甲俯平野三十里 上下池芙蕖競發馨香 擁攔楯于時也 便服乘小車暇朱墨而嘯詠之 吾以是爲太守賀 又執爵而言曰 吾老於斯矣 風雨乎亭菲乎池 眈而不入者半吾生矣 今亭與而稧且觴詠焉 莫余禁也 吾以是爲吾賀余曰 然乎否否無夸辭繕廨宇職也 循民願勢也 我順其勢毌曠厥職而己 陽城故拙長孺多病 且考己滿將朝夕去 不可以久於亭 而偕其樂奚於吾賀 爲況夫可樂在乎 民邑不在乎亭 民與邑不弊 則亭離弊猶可與樂也 民與邑或弊則 亭雖不弊 吾誰與樂 今民邑幾乎弊矣 而不克修擧惟亭 弊是修可愧也 己異日若聞賢太守 與百弊而新之日 與諸君子相羊於斯亭 吾然後爲邑爲民爲斯亭 賀乃叩檻而歌曰 亭之安兮 耈者耈綏之 亭之深兮孩者懷之翼然而敞兮 憂者則夷煥然而新兮 樂斯民之與共非曰余能後人頌

 

上之六年乙卯十一月 下浣

韓山 李承敬 記

 

 

<피향정중수기(披香亭重修記)3)>

 

   부족한 내가 태산(泰山 : 지금의 태인)의 수령에 갔던 다음해인 갑인년(甲寅哲宗51854)에 관리와 그곳의 선비들이 말하기를 이 고을의 피향정은 오래되었으며 문창후(文昌候 : 최치원)와 문청공(文淸公)의 사적이 혁혁히 남아 있는 고을 서쪽에 있는 진정()도 비워서는 안 되므로 어찌 새로 지어야 하지 않겠는지하고 묻기에 말하기를 이는 이 지방을 지키는 사람의 책임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에 몰두하다 보니 여가를 갖지 못하였는데 가을에 마침 풍년이 들어 사람들의 살림에 여유가 생겨났다. 그 때 비로소 재목을 만들고 목수를 불러 을묘(乙卯)2월 초순에 일을 시작하니 그 일에 인부가 2.692 명이요장인(匠人)577명이고 돈은 1.600(: 꿴 돈)이 들었으며 50일이 걸려 공사를 마치게 되었다. 사람들을 모아 낙성식을 성대하게 하였던 바 선비 하나가 술잔을 들고 정자를 지은 지 140년에 서까래는 부서지고 기둥은 기울어졌으며 들보만 오직 남았었는데 이처럼 하루아침에 보완이 되어 쏠렸던 것은 바로 하여져 빛나게 옛 모습을 찾게 되면서 화려함은 더욱 빛나게 되었으니 내 스스로가 이 정차를 위해 축하를 한다.”하면서 더 말하기를 이 일은 거창하였다. 처음 시작할 때 모든 사람이 걱정하였으나 민간인에게 부역을 시키지도 않고 또 농가에게 거두어지지도 않아서 이 중수공사를 알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이 낙성을 보게 되나 이곳 백성을 위해 축하를 하는 바다하면서 관아(官衛)는 좁은 들에 자리하고 있으나 샘과 돌숲과 통단의 경관이 좋아서 이 정자가 호남에서 제일가는 구경거리라 하겠다. 넓은 들 30리가 보이고 상 · 하의 연못에 연꽃이 다 피어 그 향기가 그윽하며 정자의 난간까지 피어 오르고 있어 때 마침 명복을 입고 작은 수레를 이끌고 양주(楊朱)와 묵적(墨翟 :자연을 즐기는 두 사상가)을 위해서 축하를 보낸다.” 또 술을 들고 말하기를 나는 이곳에서 늙었다. 이 정자에서 바람도 씌고 비도 맞아 보았고 또 연꽃과 그 향기 나는 연못가에서 즐기노라. 들어가지 못한지 벌써 반평생이 되었다. 이제 정자가 다시 일어났고 계()도 모아지니 그곳에서 술도 마시고 시를 읊어도 이제는 나를 막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위해 이 축배를 한다.”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럴까, 그렇지 않다고 해도 과장된 말은 아닐 것이다라고 하였다. 관아의 건물을 수리함은 나의 직책이고 내 직책에 태만하지 않을 것이다.

또 나의 임기도 거의 다 되어 떠나게 되어 있어 이 정자에 오래 머물면서 이 즐거움을 함께 할 수 없을 것인데 어찌 나에게 축하할 일이 있겠는가. 더구나 즐거움은 이 고을 주민에게 있고 정자는 비록 피폐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즐거움은 있을 것이요 이곳 주민과 고을이 혹 시라도 피폐한다면 정자는 비록 피폐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내가 그 누구와 더불어 즐길 수 있을 것인가 이제 주민과 고을이 거의 피폐되다시피 하여 이처럼 수리하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장차 어진 태수가 와서 모든 피폐를 쓸어버리고 새로워지는 날에는 여러 군자(君子) 들과 이 정자에서 더불어 노닐 수 있다면 나는 고을과 주민과 이 피향정을 위해서 축하하며 피향정의 난간을 두들기며 노래를 부르면서 정자가 편안하여 늙은이는 즐길 것이 고정자 가 아늑하여 어린이를 감싸줄 것이네. 날아갈 듯이 우뚝 솟아 있어 근심이 있는 사람은 태명 하여지고 밝고 새로워져서 이 백성들과 더불어 할 것이네. 내가 했다고 해서가 아니라 뒷사람을 위해서 축하한다네.”라고 했다.

 

철종 6년 을묘(1855) 11월 하순

한산 이승경(당시 縣藍)

 

   『태인현지(1867)에 의하면 피향정 주위에는 상하연못이 있었으며 상연지는 둘레가 1,444, 깊이가 2, 하연지는 둘레가 1,026, 깊이가 4척으로 기록되어 있다.(현재의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상연지는 450.82m, 하연지는 320.32m1786년의 태인현지와는 달리 상연지가 더 큰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미터법 환산은 개략적 추정을 위한 참고 수치이며, 시대에 따라 약간씩 환산방법이 달라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음.)

 

   1882(고종 19)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근거 미확인) 그 뒤에도 몇 차례 부분적으로 고쳤는데 1918년 김우섭 외 14명의 발의로 하연지 가운데 목조 2층의 단청인 함벽루(涵碧樓)4)를 건립하였고 한때는 사정(射亭)으로 사용되었고 1930년대 동측의 상연지를 메웠다. 1958년에 국보 443호로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63년 보물 289호로 격하 지정되었다. 1971년 함벽루가 세월이 지나 퇴락해지자 지방인사들이 목조 단청 5칸의 팔작집으로 중건하여 청년회의소 건물로 사용되어 왔고 단청은 1974년에 다시 칠한 것이다. 1977년 피향정 주변 19,300는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94년 피향정 주변 도시자연공원이 민원발생을 이유로 15,900로 축소 조정되었고 현재 15,000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피향정 상량문(중수)>

 

피향정 중수 상량문은 1장으로 작성하였다. 상량문에는 이번 중수공사의 물량과 관계자등 공사내용을 기록하였다.

 

 

<그림> 1916년경 피향정 주변 지적도5)

 

 

   영조 20년경에 간행된 태인지(泰仁志)에 의하면 피향정에는 상2개의 연못이 있었는데 상연지(上蓮池)는 둘레가 1,444()이요, 깊이가 2척이며, 하연지(下蓮池)는 둘레가 1,026척이요, 길이가 4,000척이라 하였다.(1은 지금의 곱자로 2이다.)

   상연지는 오래 전부터 있어 온 것으로 보이지만 하연지는 영조 때 현감 오언부(吳彦傅)가 새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오언부는 1750(영조 26)부터 1753(영조 29)까지 현감을 지냈다. 이승경의 중수기에 의하면 이 당시에 상하연지 모두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중수기에 의하면 「…관아(官衛)는 좁은 들에 자리하고 있으나 샘과 돌숲과 통단의 경관이 좋아서 이 정자가 호남에서 제일가는 구경거리라 하겠다. 넓은 들 30리가 보이고 상 · 하의 연못에 연꽃이 다 피어 그 향기가 그윽하며 정자의 난간까지 피어 오르고 있어 때 마침 명복을 입고 작은 수레를 이끌고 양주(楊朱)와 묵적(墨翟 :자연을 즐기는 두 사상가)을 위해서 축하를 보낸다.”(邑治于野少 泉石林園之觀獨斯亭也 爲湖右甲俯平野三十里 上下池芙蕖競發馨香 擁攔楯于時也 便服乘小車暇朱墨而嘯詠之)라는 구정이 있어 당시 2개의 연못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19년에는 하연지 가운데 있는 섬에 지방의 유지들이 십시일반 자금을 모아 사정(射亭)으로 사용할 함벽루(涵碧樓)를 세운다. 처음에는 2층 누각으로 만들었으나 퇴락하자 1971정면 5칸으 단층 팔작지붕으로 다시 중건하였다.

<표 1> 창건 이후 일제 강점기까지 피향정 연혁

년        도

내        용 

근거자료

886 ~ 887

고운 최치원이 창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정확한 자료가 없음.

1855(철종 6)에 현감 이승경이 쓴

피향정 중수기에 언급

1615 ~ 1618

태인 현감 이지굉 중건

이승경이 쓴 피향정 중수기 및 增補文獻備考

 16611664

태인 현감 박숭고 중건

태인 현감 박숭고 중건 상량문, 이승경이 쓴 피향정 중수기 및 增補文獻備考

1715 

태인 현감 유근이 중건

피향정중수기, 1786년에 간행한 태인현지에 중수기 수록

 1750 1753

현감 오언주가 하연지 축조

태인면태인현 2천년 약사(2000.12)

 1855

현감 이승경이 중수, 읍원정 건립

피향정중수기, 이때까지도 상하 연못 2개가 있었음.

 1919

김우섭 외 14명의 발의로 하연지

가운데 함벽루 건립

涵碧樓記念碑文

 1930년대

동쪽의 상연지 메움

태인면태인현 2천년 약사(2000.12)

 

 

   정확한 년대는 알려지지 않으나 지금으로부터 약 70년 전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어떤 이류인지는 모르지만 피향정 동쪽에 있는 상연지를 메워 도로와 민가가 들어서게 된다.6) 1916년 경 지적현황을 보면 상연지로 추정되는 피향정 동쪽의 지적이 주택지와는 달리 큰 필지로 남아있는 것을 알 수 있다.<그림> 이로 미루어 1916년 당시 아직 연못이 메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일제가 이 땅을 강점하면서 일본농민들을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주택지를 확보하려고 메운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표 1>

 

---------------------------------------------------------------------

1) 「…박감무에 의한 확장은 이미 아름답게 결구되었고(朴監務之增拓 旣得結構之良)

2) 「…현감 박숭고가 다시 중건하였다.(縣監朴崇古又重建

3) 이 번역문은 林南坤井邑樓亭錄(정읍문화원, 1998)에서 인용한 것이다. 재인용

4) 涵碧樓記念碑文

5) 『피향정 정비 기본계획(정읍시, 1999. 12), 20.

6) 태인현 2천년 약사(태인현 약사 편찬위원회, 2000. 12), 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