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향정(披香亭, Pihyangjeong)1)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泰仁面)에 있는 조선 중기의 누정(樓亭).
지정번호: 보물 제289호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101-2
시 대: 조선시대 중기
규모양식: 정면 5칸, 측면 4칸, 누정 익공계 팔작지붕
종 류: 누정(樓亭)
소 유 자: 국유
1. 창건
886년에서 887년경에 최치원에 의해 최초로 창건되었다는 구전이 있으나2) 증거가 미약하고 1454년에 발간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전국적으로 20여개의 누정이 기록되어 있으나 피향정의 기록은 없다.
1480년(成宗 11)에 발간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1530년(中宗 25)에 증보(增補)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누정조(樓亭條)에 그 이름은 없고 다만 ‘함담정(菡萏亭)․在客舘東’이 있을 뿐이다. 산천조(山川條)에 연지제(蓮池) 재객관(在客舘) 남일리(南一里)라 하여 연지(蓮池)가 있다는 것만을 기록했다.
피향정은 조선시대 누정으로 정면5칸, 측면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피향’이라는 뜻은 향국(香國)을 둘로 나누었다. 또는 향기를 넓게 펼친다는 의미로 본래 이 누정의 상하(上下)에는 상연지제(上蓮池堤)와 하연지제(下蓮池堤)의 연지(蓮池)가 있어 여름에는 그곳에 연화(蓮花)가 만발하여 향기가 누정의 주위에 가득 차므로 이를 뜻하여 피향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상연지가 메워져 없어지고 하연지만 남아 현재는 주변이 많이 변형되어 옛 정취는 사라지고 마치 평지위에 누정이 건립된 것처럼 보인다. 상하연지가 있어서 그 경관에 맞춰 정자를 지었을 것이라 추정하지만 이 피향정은 언제 누가 처음 건립했는지, 그 명칭은 처음부터 사용했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887년(新羅 定康王 1, 재위 886~887)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태산군수(泰山郡守)로 재임 중에 풍월을 읊고 소요하던 연못가에 세워진 정자로서 고려 현종 때 증축되었다고 전하나 정확한 초창 년대는 알 수 없다. 이렇게 보는 근거로 철종 때 피향정을 중수하고 나서 현감이었던 이승경(李承敬)이 쓴 중수기에 언급된 문장을 들고 있다. 이 중수기를 보면
「…관리와 그곳의 선비들이 말하기를 “이 고을의 피향정은 오래되었으며 문창후(文昌候, 崔致遠)와 문청공(文淸公)의 사적이 혁혁히 남아 있는 고을 서쪽에 있는 진정(鎭定)도 비워서는 안 되므로 어찌 새로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물으니 “이는 이 지방을 지키는 사람의 책임이다.”라고 말했다…(…甲寅吏士咸造而言曰 邑之披香亭古也 文昌文淸之蹟赫赫 在柏碧間 且邑西之鎭也 今頹之久矣 古不可廢鎭不可虛蓋新之 余土旴 守土者之責也…)」
이와 같은 문장이 있어 이 때문에 피향정이 신라 때 처음 지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3)
그러나 이 문장을 자세히 보면 태수를 지냈던 문창후의 자취가 남아있다는 것이지 문창후가 건립했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신라 때 피향정을 창건했다는 근거는 설득력이 약하다. 같은 중수기의 중간쯤에는 또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정자를 보수한 지 140년에 서까래는 부서지고 기둥은 기울어졌으며 오직 들보만 남았었는데 이처럼 하루아침에 보완이 되어 쏠렸던 것은 바로 하여져 빛나게 옛 모습을 찾게 되면서 화려함은 더욱 빛나게 되었으니 내 스스로가 이 정자를 위해 축하를 한다.…(…亭之修百四十年 所桷折欞推惟棟樑在耳 一朝毁者完欹者正 炳然復舊觀而增其麗 吾以是爲亭賀又執爵而言曰…)」
이 중수기가 1855년(철종 6)에 쓴 것이고 이 문장에 근거하여 14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1715년이 되는데 이때는 현감 유근(柳近)이 피향정을 중수를 한 시기이다.
피향정에 중수와 관련하여 『증보문헌비고 여지고(增補文獻備考 輿地考』에 기록이 나타난다. 그 내용은 광해군(1575~1641, 재위 1608~1623) 때 현감 이지굉(李志汯, 재임 1615~1618)이 초라한 건물을 확장하여 중건(重建)을 하였다는 것이다.4) 이때가 1617년 무렵이다. 따라서 피향정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임진왜란 이전에 창건했고 창건 당시의 건물 규모는 지금 보다 훨씬 작았으며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직후에 새로 중건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태인현읍지(泰仁縣邑誌, 1789년)』5)에 의하면 현종(顯宗, 1659∼1674) 때 박숭고(朴崇古)6)가 확장중건을 하고 상량문7)을 남겼지만 그 상량문에도 창건에 관한 내용은 없다. 그리고 오봉(鰲峰) 김재민(金齊閔, 1527~1599)의 음흡향정(吟吸香亭)에 ‘詩山南畔大池周…(시산남쪽 두둑 큰 못 둘레에…)라고 분명 연지(蓮池)를 말한 것 같으니 피향정(披香亭)은 조선 중엽 훨씬 이전부터 다른 이름으로 불리워 온 것 같다.
이렇게 볼 때 피향정의 창건연대를 확인할 근거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조선 초기에 태산과 인의가 합쳐지면서 태인이 되고 1418년(태종 18) 현감 오치선이 고을 터를 현재 태인 초등학교 위치로 옮기고 그 다음해에 관아건물을 세웠는데 이 무렵에 지금 모습과 다른 규모가 작은 피향정을 건립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정자를 건립할 때 가장 크게 참고하는 요소가 입지조건이다. 경치가 뛰어난 절경지이거나 연못을 끼고 있거나 전망이 좋은 위치가 유리하다. 그 다음으로 관아와 인접한 인근이거나 주택에 부속 건물로 짓기도 한다. 피향정은 연못을 제외하면 입지조건으로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 만약 인근에 관아가 있다면 실용적인 측면에서 피향정의 입지조건으로 고려될 수는 있을 것이다. 피향정이 건립되기 전부터 연못이 있었다면 모르지만 만약 연못이 없었다면 피향정이 태인현 관아와 관련될 수 있을 것이다.8) 이런 배경으로 보아 피향정은 태인현 관아가 건립되던 시기인 조선 초기에 관아와 비슷한 시기에 건립되어 있는데 피향정이 없는 것으로 보아 관아 부속 건물로 규모가 작아서 누락되었거나 아니면 건립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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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披香亭 修理報告書』 (정읍시, 2004. 12.)
2) … 광해(光海) 을묘년(1615)에 태인(泰仁) 무성(武城)에 서원을 세웠다. 태인에 연못이 있는데, 선생이 본군(本郡)의 수재(守宰)로 있을 적에 이 못을 파고 연을 심었다고 한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김 선생(金先生)의 시는 다음과 같다. … 『고운집(
3) 피향정에 관한 대부분의 책과 보고서에는 최초의 창건을 신라 때 최치원으로 보고 있는데 아마 이 문장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4) 增補文獻備考 券三十九 與地考 二十七 宮室 外方宮室 全羅道 “泰仁 披香亭 在縣 西一里 蓮堤上 光海時 縣監 李志宏 重建 縣監 朴崇古又 重建 權近撰記”
5) “…披香亭 在縣 西二里 舊頗隘陋 縣監 朴崇古 增修 柳近記 重修…”
6) 조선 초기 사육신 박팽년의 7대 손으로 태인 현감, 판관 등을 지냈다. 사육신의 시문 유고를 모아 『六先生遺稿』를 펴내기도 했다.
7) 피향정 중수기1에 의하면 1716 또는 1715년 현감 유근(柳近)이 큰못이 있어 대(통․서까래)를 바꾸고 기와를 고치고 옛 규모를 인용하여 새롭게 하였으며 못을 파서 넓힘.
8) 조선 후기에 쓴 『태인현지』에 의하면 없어진 상연지는 원래부터 있었으나 현재 남아있는 하연지는 1740년(영조 20)경 현감 오언부가 새로 판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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