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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례(冠禮)

1. 관례(冠禮) 상투를 틀어 갓[冠巾]을 씌우는 의식을 중심으로 한 여러 가지 절차로서, 남자아이가 15세가 넘으면 관례를 행하고, 그 때부터 한 사람의 성인으로 대우하였다. 한편, 여자는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아주는 의식으로서 계례(筓禮)를 행하였다. 이와 같은 관례의식은 『가례』의 유입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례』의 유입 이전인 고려시대에도 관례의 기록이 나타난다. 『고려사』에는 광종·예종·의종 때에 왕태자의 관례를 행한 기록이 보인다. 이로 보아 고려왕실에서도 유교식 관례를 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에서는 예서에 따라 관례를 행하였지만, 대부분의 경우 예서보다 간소하게 행하였다. 그리고 근래에 들어와서는 1894년 갑오경장 이후 단발령이 내려 머리를..

2. 혼례(婚禮)

2. 혼례(婚禮) 결혼은 전통적으로 양가의 부모님들의 뜻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으나 요즘에는 결혼 당사자의 뜻이 매우 크게 작용하고 있다. 비교적 자유롭게 이성교제가 이루어져 결혼할 뜻을 본인들이 굳힌 다음 부모들의 승낙을 받아내는 경향으로 변천되어 가고 있다. 지난날 조혼하여 14, 15세만 되면 혼례를 치렀으나 지금은 10년 이상 늦어진 25세에서 30세 내외에 결혼하는 만혼의 경향이다. 신라나 고려시대 근친혼이 매우 심했음에 반하여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 폐습을 통탄하면서 근친혼은 물론이고 동성동본혼도 엄격히 금지하여 오고 있다. 14, 15세의 처녀 총각의 집에 중매쟁이가 드나들며 당혼간의 인적사항이 소개가 되면 관선을 한다. 며느리 된 규수를 사위가 될 총각을 양가의 부모들이 각기 직접 선을 ..

3. 출산의례(出産儀禮)

3. 출산의례(出産儀禮) 1).기자속(祈子俗) 옛 부터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부귀다남자(富貴多男子)를 인간오복(人間五福)의 하나로 쳤다. 그러므로 여자는 아들을 낳아야할 절대적인 의무를 지고 있다. 그러므로 여자는 아이를 낳지 못하면 가통을 잇지 못하고 선영봉사를 못한다는 데서 죄악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부터 아내를 내쫒는 일곱 가지 조건(七去之惡) 가운데 아들이 없는 경우를 들었다. 그러므로 결혼 몇 년 동안에 생산을 못하거나 또는 생산을 해도 아들을 낳지 못할 경우는 아들을 낳기 위하여 불공(佛供)과 산제(山祭)를 드리고 한방약(韓方藥)을 쓰기도 했다. 기자신앙(祈子信仰) 가운데 불공치성이 예부터 가장 많이 행해지고 있다. 시기는 무당․점쟁이의 분복(分福)으로 손(損)이 없는 길일(吉日)을 택..

4. 회갑례

4. 회갑례(回甲禮) 회갑은 즉 환갑인데 이는 태어난 해의 간지인 육갑에 다시 돌아왔다는 뜻이며 인생으로서 수(壽)를 충분히 누려 매우 경사스럽다는 육십년의 생일이다. 요즘은 의술과 환경의 변화로 사람의 수명이 크게 연장되어 환갑이 매우 흔할 뿐만 아니라 환갑 전에 죽으면 매우 애석하게 생각하지만 예전에는 ‘인생 오십’이라 했고 ‘인생 칠십 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했으며 중국의 남송 시인 육방옹(陸放翁)의 시에도 “인생은 길어도 백년을 못살며 육십, 칠십이 고작이다.”라고 말했음은 육십 회갑은 장수에 든다 하겠다. 회갑연은 자녀들이 좋은 옷과 많은 음식을 마련하여 큰 교자상을 차려 모시고 슬하의 자녀들이 절을 하고 더욱 장수하심을 비는 헌수의 술잔을 바쳐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린다. 친지와 친척을 초청..

1. 의생활(衣生活)

1. 의생활(衣生活) 우리 민족이 백의민족이라고 불린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옛날부터 흰옷을 입어왔다. 언제부터 흰 옷을 즐겨 입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위지(魏志)나 수서(隋書) 등의 중국 고문헌에 흰옷을 입었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을 보면 오랜 예부터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일상복의 색깔은 흰색 계통이 으뜸이고 흑색을 제외하고는 젊은 여인이나 아이들은 진한 색옷을 입었고 중년 이후의 남녀도 옅은 색으로 입었으나 색의 교합은 피하고 순색을 입었다. 옷감은 무명베, 마포, 명주를 사용했으나 견직물은 서민들이 쉽게 입을 수 없는 옷감이었으며 모직물은 사용할 줄 몰랐다. 옷은 남녀 모두 상의와 하의가 따로 되어 있으며 남녀복의 모양이 저고리를 제외하고는 현저하게 다르며 비교적 넓고 길..

2. 식생활(食生活)

2. 식생활(食生活) 식생활은 특별히 다른 것은 없으며 우리나라 일반적인 식생활처럼 주식과 부식 그리고 음료수로 이루어진다. 주식물의 재료는 쌀, 보리, 좁쌀이 주종을 이루고 쌀로 지은 밥을 최상의 것으로 여기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리나 좁쌀을 혼합한 주식을 먹었다. 부식물의 재료는 채소를 재료로 한 김치가 주종을 이루고 생선도 좋은 부식으로 밥상을 풍성하게 했다. 신선한 날 것 그대로 자연식을 하기도 하지만 굽고 지지고 끓이고 볶으며 삶고 찌고 말리고 띄우는 등 가지가지의 요리법이 발달하였다. 상차림은 주식 부식 모두 한꺼번에 차려 몇 사람이 함께 앉아도 국을 제외하고는 부식을 공동으로 집어 먹는다. 먹는 사람의 식성에 맞게 종류의 부식을 차려 놓는다. 식사는 하루 세끼를 하며 아침을 중요시 하고 ..

3. 주생활(住生活)

3. 주생활(住生活) 생활의 보금자리인 가옥은 생활의 종류에 따라 일자리 부근에 짓고 살았으며 농촌, 어촌, 산촌 등의 가옥이 있다. 가옥의 건축은 목재와 흙을 주재료로 하여 지었으며 지붕은 짚으로 나래를 엮어 덮었다. 대체로 집을 낫게 짓고 벽은 두꺼우며 채광과 통풍이 원활하지 못한 것은 추위를 막기 위함이며 방바닥은 방짝이라는 넓적한 돌로 구들장을 깔아 흙으로 바른 온돌로 되어 있어 부엌 아궁이에서 불을 때어 밥도 짓고 방도 따뜻하게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었다. 변소는 안변소와 사랑변소가 각기 있고 생활이 부유하고 가족 수가 많거나 이름 있는 사대부 집이나 벼슬아치 그 후예들의 집은 사랑채와 안채를 구별하여 짓고 그에 따른 부속 건물로 남자 종이나 머슴들이 거처하는 바깥행랑채 여자종들이 거처하는..

태인의 우물

물, 그 생명의 근원 한국인에 있어 물은 산과 더불어 생활환경의 양대 기반이 된다. 배산임수(背山臨水)란 말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그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물과 산, 이 양대 기반은 모두 풍요로운 생산성, 또는 영원한 생명력의 상징으로 우리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이들 중 산은 성스러운 종교적 성역으로 추앙받는 대신, 물은 여성과 관련되어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모태(母胎)로 인식된다. 물 중에서도 땅에서 솟는 샘물은 생명의 원초적 잉태를 뜻한다. 정천신앙(井泉信仰)이 우리의 건국신화에서 주류를 이루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는 나정(蘿井)가의 알에서 태어나 샘〔東泉〕에서 몸을 씻었다. 그의 비(妃) 알영도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난 계룡(鷄龍)의 왼쪽 ..

교통과 통신[역체(驛遞)]

교통과 통신[역체(驛遞)] 1. 역참(驛站) 국내 교역이 대부분 장시나 행상에 의존해 있던 만큼, 도시와 도로의 발달은 더디었다. 지방에는 관아를 중심으로 극히 작은 행정적 소도시가 있을 뿐이었고, 이런 소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작은 길이 있을 뿐이었다. 육상교통으로 사람은 보행, 기마 이외에는 교자(轎子)를 주로 사용하였고 짐(物貨)을 수송하는 데에는 인력, 소나 말 이외는 관에서는 대차(大車), 편차(便車), 곡차(曲車), 강주(杠輈) 등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보통 가정에서는 전거(田車) 조차도 보급되지 못하였었다. 물화의 수송에는 인력과 우마가 이용되었을 뿐, 민간에는 수레도 보급되지 않았다. 수로에서는 판선(板船)이 많이 이용되었다. 우리나라 역로(驛路)제도는 487년(炤知王 9) 신라(新羅)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