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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당(城隍堂) 및 단(壇)

성황당(城隍堂) 및 단(壇) 성황사 현의 서쪽 4리에 있다.1) 성황사(城隍祠) 관아의 서쪽 4 리에 있다.2) 태인면(泰仁面) 태성리(泰成里) 성황산(城隍山)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이곳은 당우(堂宇)를 건설(建設)하였다. 거금(距今) 390여년전에 영천(靈川) 신잠(申潛)이 현감(縣監)으로 부임(赴任)하여 거산(居山)에 있는 읍(邑)을 이곳으로 이전(移轉)하고 치적(治績)이 대행(大行)하였음으로 읍인(邑人)이 그를 사모(思慕)하여 당우(堂宇)를 건설(建設)하고 선생(先生) 부처(夫妻)와 자녀(子女)의 초상(肖像)을 건설(建設)하고 삭망(朔望) 마다 관속(官屬)이 지성치제(至誠致祭)하며 새로이 임직(任職)을 당(當)했거나 소원(所願)하는 바 있으면 여기에 기도(祈禱)하였고 당시 리방(吏房)이 국세(國..

애련당(愛蓮堂)

애련당(愛蓮堂) 피향정(披香亭)의 북편(北便)에 애련당(愛蓮堂)이 있어서 역시(亦是) 구조(構造)가 정교(精巧)하고 화려(華麗)하더니 거금(距今) 50여년전(五十餘年前)에 훼철(毁撤)되고 그 후적(後跡)에 점포(店鋪)가 버려있으며 상지(上池)는 보토(補土)하여 현(現) 시장(市場, 그 당시에는 아래시장)이 되었다.1) ----------------------------------- 1) 張奉善,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36. 11. 20.), 60.

여단(厲壇)

여단(厲壇)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1) 관아의 북쪽 5 리에 있다.2) 여제단(厲祭壇) 태인면(泰仁面)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주(註) 어떤 군현(郡縣)을 물론(勿論)하고 읍(邑)의 주산(主山)을 성황산(城隍山)이라하며 산정(山頂)에는 필(必)히 성황단(城隍壇)이라는 제단(祭壇)를 세우고 성황신(城隍神)을 안위(安慰)하여 춘추(春秋)에 제사(祭祀)를 드리는 것이니 군(郡), 현(縣) 내의 질병(疾病)과 재앙(災殃)을 예방하게 하는 것이다. 주(註) 모든 군현(郡縣)을 물론(勿論)하고 이를 설치하여 여질(厲疾, 傳染病)의 유행(流行)하는 시기에는 필(必)히 제사를 드려야 질병(疾病) 예방(豫防)을 발원(發願)하는 것이다.3) 여제단(厲祭壇) 태인군의 북쪽 3리에 있었고 지금은 부서져 없어졌다. 주: ..

제 5절 암행어사와 태인

제 5절 암행어사와 태인 1. 1717년(숙종 43) 전라우도 암행어사 조영복 - 정치란 거문고와 같아서 어사 조영복이 전라우도 태인 땅에서 겪은 이야기. 어사 조영복은 강직하게 고을을 다스렸으나, 간활한 아전들의 비리를 끝까지 단속하지 못한 김상옥의 사연을 밝혀낸다. 숙종 43년 봄. 장날을 맞은 말목장터에는 사람이 바글바글 끓었다. 말목장터는 부안, 태인, 정읍으로 가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에 있는 장터로, 매월 숫자가 3과 8로 끝나는 말목장날이면 인근 고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갖가지 물건을 사고팔며 정을 나누던 유서 깊은 곳이었다. 장터 한켠에 말이 쉴 수 있는 마방까지 갖춘 탓에, 서산의 마방, 서울의 말죽거리 등과 함께 배들평(전북 정읍시 이평면 두지리.) 말목장은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사노 한..

제 6절 태인군(泰仁郡)의 선생안(先生案)

제 5절 태인군(泰仁郡)의 선생안(先生案) 조선시대 모든 지방에는 수령(守令)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 ‘칠두칠사(七令七事)’라 이르는 임무를 맡아 행정․사법․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향촌을 통치하였을 뿐 아니라, 향촌민의 생활전반에 실로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이들을 ‘목민관(牧民官)이라는 이름이 그렇듯이 백성의 어버이요 스승이었다. 따라서 전통시대에 있어서 향촌민들의 편(便)․불편(不便)과 안위(安危)는 거의 수령들의 현부(賢否)에 달려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조선시대 편찬된 읍지(邑誌)마다 수령의 명단을 빠트리지 않고 기재한 것도 지방사회 운용에 있어 수령이 차지하는 막대한 비중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 시대, 한 지역의 역사를 보고자 할 때 빠트려서는 안 ..

비지정 누정 문화재 - 읍원정(挹遠亭)

읍원정(挹遠亭) 항가산은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 있는 야트막한 산으로 조선 시대에 사림(士林)의 소유지였으며 풍치가 뛰어났다고 전해지는 항가산(恒伽山) 오르막에는 원두막 같은 대원정(大願亭) 정자가 물길위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자식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한다 또 그 길로 조금만 가면 중턱에 1855년(철종 6, 丙辰) 태인(泰仁) 현감(縣監) 이승경(李承敬)이 시주(詩酒)로 음풍영월(吟風詠月)하며 선비들에게 문학(文學)을 권장하기 위해 유림 49인과 함께 시사(詩社, 詩稧; 시를 짓고 즐기기 위하여 만든 모임)를 만들며 태인면 태성리 152번지-2에 세운 건물이다. 이 정자를 읍원정(揖遠亭)이라 부르고, 이는 「遠呑山光(원탄산광) 平挹江瀨(평읍강뢰)」라는 의미이다.(멀리는 산..

전승(傳承)놀이

전승(傳承)놀이 1. 일반적인 놀이 1) 줄다리기 정월이나 7월에 있는 놀이인데 한 부락에서 할 때에는 마을의 중앙을 뚫는 도로 또 내[川]를 분계(分界)로 하여 부락을 상하로 나누어 승부를 내고 진 쪽에서 주식(酒食)을 내어 즐겁게 논다. 부락끼리 대항할 때에는 시장 같은데서 하고 마을에 따라서는 남녀가 조로 나누어 하기도 한다. 이 때 미성년자는 여자 편에 낀다. 줄[綱]은 자강(雌綱: 암줄)과 웅강(雄綱: 수줄)을 가져와서 두 개를 이을 때는 농악을 치며 고함을 지른다. 이 줄다리기로 마을이 떠들썩하게 되면 연중 액운이 없다는 것이다. 이 때 암줄은 머리 부분을 둥글게 만들고 수줄은 머리 부분을 둥그런 막대같이 만든다. 2) 다리 밟기(踏橋) 정월 대보름날 태인 대각교(大覺橋)의 다리를 건너고 돌아..

세시풍속(歲時風俗)

세시풍속(歲時風俗) 세시풍속은 1년을 주기로 계절에 따라 관습적으로 되풀이되는 생활행위로서 계절의 변화가 뚜렷하고 농경문화를 기본으로 하는 우리 민족에 있어서 더욱 발달하였다. 이처럼 우리의 세시풍속이 농경생할 위주로 되어 있는 만큼 전승놀이도 농경생활과 관련되어 왔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으로 여기는 농경생활은 24절기(節氣: 節候)마다 행사가 따르고 명절도 농절(農節)과 관련이 있다. 고대에 제천의식을 5월과 10월에 거행한 것은 농경시기와 관계가 있으며, 정월에는 안택(安宅)을 해서 1년 동안 가내태평(家內太平)을 빌었고, 가을에는 새로운 곡식으로 천신(薦新)하여 고사를 지내 감사의 뜻을 밝혔다. 우리의 세시풍속이나 놀이는 거의 정월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것은 일년지계(一年之計)는 정월에 ..

속신이란?

속신(俗信)은 민속신앙의 준말이 아니며, 또한 민간사고와도 별개의 개념이다. 민속학의 여러 분야 가운데서도 비교적 근자에 관심을 모은 새 분야에 속하는 것으로 ‘folk-belief ’의 역어(譯語)이다. 인과론적인 주술심리를 비롯해서 감염원리 또는 유사원리의 주술심리로 말미암아 생겨난 사고의 체계이면서 그 체계는 나아가 행동의 체계까지 유발한다. 주술적 함축성이 있는 속신을 신성 속신이라 부를 수 있는데, 세속적인 속신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민간의 사고체계라고 할 때, 흔히는 이른바 ‘민간사고’가 연상되는데, 민간사고는 오히려 민간의 철학이라고 부를 만한 종합적인 관념의 체계, 사상의 체계이다. 민속의 모든 영역이 하나하나 그물의 코같이 얽히고 설켜서 마련한 결과에서 비로소 민간사고는 추출해 낼 ..

태인의 속신

속신(俗信) 1. 잠밥 메기기 가정에서 누가 병이 나면 그 집의 노파가 됫박에 쌀을 가득 담아 보자기로 싸서 병자의 아픈 데를 쓰다듬으며 그 해의 년·월·일과 병자의 나이, 성명, 가중(家中)을 들먹이면서 “사대삭신 6천 마디가 모두 저리고 아픈데 강남서 나온 잠밥 각시가 영금코 기엄하다 해서 이렇게 불러 먹이고 웨멕이면 다 시원하고 개운하고 은으로 세수하고 분으로 도금하듯 그저 앉았다, 섰다, 거짓말 말고, 진 놈 먹고 마른 놈 가지고 오든 길로 훨썩 물러 가렸다. 하나 쉐, 두 쉐, 세 쉐, 다 시원하고 개운하게 물러 가렸다.” 이렇게 하고 나서는 헌 짚신짝에다 겨를 담아서 불을 피우고 밥, 된장, 소금, 쌀 세닐곱 21개를 됫박에서 집어넣고 병자의 머리에다 좌우로 세 번씩 둘인 다음에 병자가 침을 ..